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55. 먼구름 한형석 선생의 압록강(鴨綠江)행진곡

무극인 2008. 10. 27. 13:03

* 먼구름 한형석 선생의 압록강(鴨綠江)행진곡

한형석(韓亨錫) 선생 이라면 몰라도

“먼구름” 선생이라 하면 아는 사람이 많다.

좁고 긴 얼굴, 고급 양복 차림에 베레모를 쓰고 마도로스파이프,

그리고 신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지가 굳고 고상한 인상을 풍겨 준다.

애국심이 투철한 애국지사이다.

먼구름 한형석 선생은 내가 초등학교 근무 당시에

교육 자치제 축하 행사로 『아동극 경연대회』에 참가했을 때

내가 지도한 동극을 심사하고부터 친 아우처럼 아껴 준 것이다.

부민동(富民洞) 변전소 부근에 있는 자택으로 초대 받은 일이 있었다.

자택 바로 앞에 문도 보이지 않고, 자연스런 생나무로 지은

판자 집을 가리키며

     “내가 지은 『자유아동극장』이다.

     거리를 방황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은 아동극장인데

     재정난으로 2년 만에 문을 닫고 …….”하면서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뒷날 내가 아동극단을 창설하여 활동할 때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주점에서나 다방에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다가 헤어질 때는

수첩 속에서 꾸김없는 지화(紙貨) 몇 장을 꺼내시며

  “차비 없지?”하는 등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평생을 올곧게 사시면서 자신을 위하기보다

남에게 먼저 배려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는데

때로는 얄밉기까지 하였다.

30년 전『부산 상록수(常綠樹) 노인 합창단』을 조직할 때

물심양면으로 앞장서서 애쓰신데 대하여 그 보답으로 초대 단장으로 모셨다.

특히 선생께서 작곡하신

『압록강 행진곡』

   “우리는 한국 독립군/ 나라를 찾는 용사로다……”를

우리는『상록수 합창단 』단가처럼 애창했다.

방부원(房富源)이 조율(調律)한 피아노로 김윤아(金允兒) 반주에

박형태(朴亨泰) 지휘로 행진곡을 힘차고 멋있게 부르곤 하였다.

 어느 날 선생을 모신 자리에서

자랑삼아 행진곡을 부르게 되었는데

선생께서는 경청 후에

     “이 노래를 행진곡답게 잘 불러야 하지만,

      이 노래는 달라. 당시 상황의 진수한 감정이 없어,

      독립군이 굶주려 배고프고 연일 고된 훈련에

      지친 몸을 이끌고 행진을 하면서 부르는 행진곡이

      그렇게 정확하고 잘 불러서는 실감이 안나.

      힘없이 허덕이는 용사의 처지가 된 분위기를

      상상하면서 목소리를 돋아 악을 쓰고,

      아픈 다리로 땅을 굴리며 전진하는 그런 장면을 말이야!

      박자, 음계가 서로 틀리는 등 개개인의 감정이 표출되면서

      어우러지면 혼합 중창이 되는 거야.

      비록 음악의 본질에서 벗어날지는 모르지만

      살신애국(殺身愛國) 독립군의 기질의 표현 말일세!”

 참말로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선생은 당신이 몸소 체험했던 그때 그 분위기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먼구름 선생은 동래(東萊) 출신으로

부친은 의사(醫師)이며 장개석(張介石)의 주치의(主治醫)이면서

독립투사인 한흥교(韓興敎)선생의 둘째 아들이요,

부산민속협회(釜山民俗協會) 회장으로 공이 많은

설봉(雪峰) 한원석(韓元錫)옹의 아우이다.

3부자 모두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았다.

설봉 선생도 나를 친아우 같이 대해 주셨고,

생전에

   “내 동생 먼구름과 증곡만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치러 낼 수 있다”고 항상 장담하였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상록수합창단. 1991, 7, 10 )- 오른쪽 끝이 필자 

 

 

 (상록수합창단 박형태 지휘로 송년의 밤 공연 장면)- 앞줄 오른쪽 두번째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