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신출(禹新出) 화백(畵伯)
8절 백노지 다발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거리에서 혹은 열차 속에서나
어디에서든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콩테(conte)로 크로키(croquis)하는
우신출 화백은 화가 중에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려버리는 속필로 하루에 수 십장씩 그려낸다.
과거 부산 대표 축구 선수 수비수로 활약할 때 알게 되면서
때로는 같은 팀에 소속되어 뛰기도 하였으며 대회를 앞두고 같이 합숙하기도 하였다.
당시 부산 수정동에 살면서
마다리에 아교풀을 먹인 사제 캔바스(canvas)에 유채(油彩)로 그림을 그렸다.
어느 해 부산 미술 응모전에 처녀 출품을 하였는데
그 화제(畵題)가『시인(詩人)의 집』이었다.
우거진 대나무 숲 속에 초가집 일부가 보이는 10호 크기의 작품이었다.
심사위원이 그림의 내용을 설명할 것을 요구하였을 때
우화백은 “한적한 외진 곳에 바람소리와 매미 울음 속에 묻혀 사는 이 집 주인이 바로 시인(詩人)입니다.
그래서 나는 시인(詩人)의 집이라 화제(畵題)를 붙인 것입니다.”고 말했다.
낙선했지만 이듬해에『시인(詩人)의 집』을 다시 출품하여 또 낙선의 쓴잔을 들었다.
다음해 세 번째 연속 출품하였을 때는 작가의 끈질긴 고집에 못 이겨
동정 입선시켜 주더라는 우화백의 이야기다.
당시 미술전이라 하면 몇 사람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만 한 미술가도 없었고
일본인들이 취미로 그릴정도였고,
간판가, 혹은 영화관 마네킹화가들이 주가 되어 미술전이 개최되던 시절이었다.
우 화백은 술과 흡연을 하지 않는다.
젊어서 축구 부산대표선수 수비수로 활약하였고
취미로는 만도린 연주가 일품이었으며 참 교육가이다.
나와 만날 때면 차를 마시기보다는 간단한 요리를 먹곤 하였는데
오늘도 남포동에 있는 「부산튀김」집에서 새우튀김을 먹고 나와서
거리를 걸어가는 우리 앞에 젊은 남녀 한 쌍이 걷고 있었다.
마침 청년이 피우던 담배꽁초를 발 앞에 던져 버리고는
발로 비벼 끄지도 않은 채 그냥 지나치려는 순간
“여보 선생!”하면서
나는 담배꽁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젊은이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한번 쳐다봤다가
동행 처녀를 쳐다보았다.
동행자에게 자존심을 호소하는 눈치였다.
암시를 받은 듯 꽁초를 슬그머니 집어 가는 것이었다.
우 화백은 “말했다가 자칫하면 당하는 수가 있으니 못 본 척 하는 것이 좋아!”
나에게 충고의 말을 던지면서 바지 주머니에서 한 주먹 꽁초를 내 보이는 것이었다.
말없이 모범적 행동을 실천하는 인간 우신출의 진면목을 재발견하였다.
일본2과전회원(日本二科展會員)인 도고세이지(東鄕靑兒) 화백이
부산일보사 초청으로 사옥 4층 프레스 홀에서 미술실기 강습회가 있다는 우신출 화백의 연락을 받았다.
우선 회원으로 가입부터 하고, 강습을 받으면서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
김원갑(金元甲) 화백은 이 강습회의 동기생이다.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카테고리의 다른 글
63. 김종식(金鍾植) 화백(畵伯)의 정(情) (0) | 2008.12.22 |
---|---|
62. 석불(石佛) 정기호 선생 (0) | 2008.12.18 |
60. 연극인 설상영(薛相英) (0) | 2008.12.03 |
59. 인간 이시우(李時雨) (0) | 2008.12.03 |
58.길포 박원표(吉浦 朴元杓)선생 (0) | 2008.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