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70. 화가 임호와 백촌장

무극인 2009. 4. 1. 10:35

    * 화가 임호와 백촌장

광복동(光復洞) 입구에 부산의 문화인 총집결소(總集結所)로 만들어 봉사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주점, ‘대학촌’은

주인의 성(姓)이 백씨(白氏)이였는데 우리는 그를 백촌장(白村長)이라 불렀다.

백촌장은 드물게 있는 남근(男根) 수석(壽石)을 귀중하게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 가끔 자랑하기도 하였다.

한편 화가 임호(林湖)는 이 보다 더 귀한 여수석(女壽石)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오래 전부터 남·여수석을 따로 둘 것이 아니라 처녀, 총각 몽다리귀신 되기 전에

혼사시켜서 함께 살기로 하는 것이 이 두 애비의 도리라는데 서로의 의견의 일치는 보았다.

그런데 이 크나큰 대사가 성사되려면 어려움이 예견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백 촌장은

   “ 남자 집으로 시집와서 내 며느리가 되는 것이 원칙이다”고 주장하고,

임호 측은

   “내 딸을 술집에 시집보내 고생시키는 것이 애비의 도리가 아니고,

    데릴사위도 있는 법이니 신랑이 신부 집으로 와야 한다!”라고 팽팽히 맞섰다.

서로가 상대편의 수석을 가지려고(?) 안간힘으로 애쓰는 모습들이 사뭇 흥미진진할 정도였다.

어느 날 『대학촌』에서 동석한 임호가

   “우리 집에서 결혼식(?)만을 올릴 수 있도록 천형이 백촌장을 설득시켜 준다면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한번만 도와주시오”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시집을 가던지, 데릴사위로 오던지 간에 혼례식(?)은 올려야 될게 아니냐?

백촌장 집은 주점(酒店)인 관계로 식장으로는 어색하니,

영도(影島)에 넓고 조용한 임호 집에서 대사(?)를 치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였더니

   “천 선생만 입회하여 준다면 영도 임호 집도 괜찮지”하고 양가 애비가 쾌히 승낙하였다.

남석(男石)을 조심스럽게 보자기에 싸들고 세 사람은 영도 동삼동으로 향했다.

임호 자택에 들어서니 먼저 마당에 놓여 있는 화분들이 한 눈에 들어왔는데 화초들이 모두 말라 시들어 있었다.

추위가 다 갔다고 해서 화분을 바깥에 내어놓은 것이 하룻밤 추위에 그만 저렇게 되었다면서 임호는 못내 아쉬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추위가 채 가시기 전인 4월 달로 기억된다.

식구들을 바깥에 내 보내고, 병풍을 치고 한 됫병 청주(淸酒)와

이웃 쥐고기 공장에서 선물로 받은 쥐고기포, 그리고 과일 몇 개 놓고 촛불을 밝혔다.

나는 양가 두 애비 되는 사람이 진지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남녀 수석을 양쪽에 서로 마주보게 놓아두고

경근한 마음으로 첫술을 치고 인간세에 요식적(要式的) 절차를 생각하여

내 나름의 행위로 진행하면서 오늘 주인공인 두 수석의 무궁한 해로(偕老)를 빌었다.

백 촌장과 임호 그리고 나 셋은 세상에 없는 희귀한 결혼식을 축하하면서 축배를 들었다.

임호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우리 집으로 장가를 들었으니 첫날밤을 여기서 세워야 마땅하다”면서 한잔 가득 부어 잔을 내 밀며

   “자아! 사돈 한잔해라!”면서 백촌장에게 잔을 권했다.

백 촌장은 잔을 받아 들고

   “그만 내가 뺏기고 만 것인가?”

또 “신혼여행 다녀오면 시가(媤家)로 보내 줄 테지?”하면서 씁쓸한 표정으로 진짜 쓴잔을 마시는 것 같았다.

나는 생애 전무후무의 수석 결혼에 주례를 선 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