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선생님 회고록에 붙여
한국적 원초성에 돋을새긴 현대예인정신
채 희 완(부산대 교수, 미학)
선생님을 처음 뵈온 것은 1972년 1월 부산 서면께의 어느 작은 2층 사무실에서였다. 그곳은 작업실로도 사용되는 듯 여기저기 바가지 탈들이 널려 있어 마지막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공방에 쓰이는 도구들을 한쪽으로 물리치시며 우리를 맞아주셨다. 우리는 그때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회원들이었는데, 방학을 맞아 들놀음의 고장 부산 동래를 찾았던 것이다. 선생님은 「동래 들놀음」의 탈에 대하여 새로운 의견을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탈전문가로 보시는 듯 반가워하셨다. 우리는 실상 탈과 탈춤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애송이였다. 우리는 다만 지난해 봄(1971년 4월) 서울 명동의 코스모스백화점 전시실에서 열린 「천재동 창작가면 특별전」(문공부 문화재 관리국 주최, 한국가면극 연구회 주관)을 보고 창작탈이 던져준 문화적 충격을 말씀드릴 따름이었다. 선생님은 이 시대에 살아있는 인물형상을 나의 마음과 눈과 손으로 찾아 그려나간다는 것이고 종래의 가면 제작기법에서 한걸음 나아가야한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오늘 살아있는 탈’과 ‘새로운 탈 기법’에 관한 말씀은 기존의 전승탈과 전승탈춤만을 고수하여 아카데미즘을 지키려고 해왔던 우리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는 터였다. 특히 종래의 탈이 바가지에 나무조각이나 노끈, 종이흙 등을 덧붙이는 이른바 조소적인 방식인데, 여기에 바가지의 겉살을 파고드는 조각적 기법을 가미한다는 것이 이채로웠다.
요철굴곡이 심하고 음영이 짙은 일본가면을 연상시키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선생님의 탈 형상은 전형적인 한국 서민의 얼굴, 그것이었다. 이는 1978년 5월 서울 희화랑 「천재동 탈작품전」, 그리고 1980년 2월 서울 신세계백화점 전시실 「천재동 탈과 토우전」에서 더욱 뚜렷이 확인되는 바이었다. 김열규 선생은 앞의 작품전에 대해, 가면무극의 속뜻을 ‘탈’ 하나로 연출하여 “움직임을 보이지 않게 내포하고 있는 판토마임”이라고 하면서, “춤꾼도 없이, 발림이나 사설, 장단도 없이 그저 혼자 제 흥에 겨워 절로 노니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신명나는 일”이라 평하였다. 뒤의 작품전에 대해 이종석 선생은 “영물적 도구에서 예능적 도구로 정립된 하나의 미술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원초적 감성’으로 친근감을 자아내는 ‘향수 어린 서민상이요 자화상’으로서, 그 기법에서도 “바가지 거죽에 직접 조각하거나 부착물에 조각을 곁들이는 한편 바가지 자체에 필요한 부분을 오려내어 제자리에 도로 돋우어 붙임으로써 더욱 돋보이는 효과를 얻어냄”으로써 “오랜 역사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미의 뚜렷한 한 부분”으로 정립되었음을 언명하였다.
창작탈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젊은 시절 이미 아동극 운동을 하면서부터 시작한 것인데, 아동극의 대부분이 탈극이자 오페레타 형식이라고 하셨다. 말씀대로 선생님은 어린 시절 화가 아니면 연극인이 꿈이셨다.16세 때 고향 방어진에서 창작극「부대장」을 공연한 적이 있을 뿐아니라 20대에 일본에 유학을 가서 현대미술을 익히고 (1939~1940년 동경 태평양 미술학교, 가와바다회학교(川端畵學校) 소묘과 수료, 인체과 중퇴), 서울과 동경에서 현대 연극을 배웠다(1941년 현대극장 주관 <국민극연구소> 수료, 일본 동경 동보계극장 <有樂座> 수료)고 하신다. 바로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에 현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을 아우르고서 이 시대의 것을 창조할 수 있었음을 짐작하겠다. 선생님은 1971년 동래야류 가면제작 기예능 보유자가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런 일을 수행해 오신 터이다. 보유자는 원형의 보존이 일차 임무임에도 선생님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셨던 것이다.
25년 교직생활에서 늘 초등학교(기금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으면서 1953년 「병원놀이」를 시작으로 해서 수많은 아동극을 제작, 연출, 출연한 끝에 드디어 1972년 단독으로 「제1회 부산 시민위안 민속놀이잔치」를 개최하셨다. 이후 다섯차례나 혼자 힘으로 몸을 바쳐 일구어낸 행사는 말로만 들어도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특히 1975년 2회 행사는 「웅박캥캥」이란 길놀이와 함께 무언가면무극 「두 마리의 당나귀」, 그리고 창작가면과 토우전 등 악가무의 유동장르와 시서화의 고정장르를 동시에 아우르는 행사였다. 그도 그러하려니와 특히 남녀고교민속반 400여명이 동원되어 가장행렬로 광복동 거리를 가득 메운 정경은 그 앞에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나아가는 길을 막을 자가 없는 현대민속 국중대회라 일컬어 좋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장대한 가장행렬은 서구의 사육제와도 비견될 것이지만, 그 바탕은 동래지역의 앞놀이에 그 근거를 둔 것이었다.
생동하는 현장기록, 「동래야류」 「동래지신밟기」 연희본
우리는 선생님을 그때 처음 뵙고선 그해 4월 심우성 선생이 출판하는 「서낭당」4집에서 「동래야류연구(가면을 중심으로)」라는 글에서 또 뵈었다. 그 글을 읽고 더없이 반가운 터에 심우성 선생으로부터 그 이후의 작업 소식을 들었다. 「동래야류」 연희본을 정립한 것을 비롯하여 「동래야류」 길놀이를 발굴하여 도해화(圖解畵)로 남기고, 이어서 「동래지신밟기」연희본을 정립하고 「동래학춤」무보화에 총력을 쏟으면서. 위 3종목의 총연출을 담당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통의 골격 속에서도 각기 지닌 개성을 발휘하도록 판을 열어놓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길놀이, 앞놀이, 뒷놀이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선생님의 혜안에 감복하면서 한편 그것의 복원에 기울인 그 노력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의미깊은 사실을 떠올렸다.
그 첫번째로서, 길놀이, 앞놀이는 전통시대의 흔적일 뿐 소멸되어 마땅한 연극이전의 단계라고 단정해온 연극학계의 시각을 대폭 수정케하는, 우리의 당당한 연행유산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을 곳곳을 돎으로서 마을 전체를 연행의 현장으로 감싸는 것인 동시에 살아가는 그곳에서 연행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삶과 예술의 일치를 이루는 의미깊은 과정인 것이다. 바로 이를 토대로 하여 중심행사인 판놀음이 벌어지는 것이어서 이들은 판놀음인 탈춤을 낳는 포태(胞胎)인 셈이다. 이로써 중심행사는 강화되고 주변은 유기화된다.
또 한가지는 연희본의 출렁이는 현장적 기록성이다. 대개의 탈춤대본은 재담(대사)중심의 희곡대본형식을 취하여 왔다. 그러나 탈춤의 중심표현매체는 오히려 탈과 춤이 아니던가. 탈과 춤이 빠진 탈춤은 상상키 어렵다. 더욱이 출연자들의 배치, 배열, 동작선, 관중과의 교호관계 등 탈판을 생동하는 판으로서 현장적으로 생생하게 기록하는 방식이야말로 탈춤의 특성을 고스란히 살려낼 수 있는 것일 터이다. 이러한 작업은 영상기록이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에도 일차적인 현장기록방식(notation)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선생님은 이미 30여년전에 이를 착안해내셨다.
탈 세계의 만신으로 서민 삶을 보듬어
1985년 선생님이 사시는 부산으로 직장을 옮겨옴에 따라 자주 뵈옵게 되었다. 선생님이 방어진에서 울산으로, 울산에서 부산으로 거처를 옮기신 이후 토곡동에서만 집을 옮겨가며 사시는 연유를 들으면서, 한국인의 마음의 보금자리에 선생님의 예술적 거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전한 것은 남녀노소 화합의 두레정신을 이어내려 삶을 소박하게 보여주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신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반 서민의 생활감정에 심취해 탈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듯이 흙으로 빚어내는 토우는 그 주제를 우리의 동요, 민요에서 찾아내, “쓰러져가는 한국적인 정경이 못내 아쉬워 만든다” 는 선생님의 언표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선생님과 탈이 동화되어’’(김태근), ”탈이 선생님을 만드는 것 같다’’(손심심)하며 “한국의 얼굴이시며 영원한 동심을 소유하신 만연동자”(김태형)라고 선생님의 품을 간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가난하고 병들고 못사는, 억울한 이들을 보듬어 살을 풀어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덕이 많은 무당을 만신이라고 이른다. 수많은 신을 몸에 모셨다는 뜻이다.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한다는 뜻일 게다. 선생님의 창작탈과 토우에서 우리는 선생님이 혹시 탈의 세계에서 만신이 아니실까하고 해서 머리가 절로 숙으려진다. 이러한 애틋한 마음은 잊혀진 듯 애잔한 듯 동요풍속화집『달노래 별노래 새노래』(1998년 도서출판 시로)로도 묶어졌다. 이러한 동심은 순수무구한 것, 생명근원적인 것과 통하여 이윽고 노경(老境)의 무심(無心)의 세계에 다다른다.
그러나 선생님의 체취는 서민적인 삶의 정서에서 뿌려진다. 이는 기층을 토대로 민족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삶의 기저를 탐색하는 데서 온 것이다. 그러기에 탈과 토우의 페르소나 속에 인간의 희노애락 감정이 잠겨있고 ‘속울음 겉웃음’의 탈이 실제 삶의 한가운데서 울음 끝의 웃음으로 다가온다. 삶과 탈이 하나이니 그것은 마침내는 질박한 한국적 원초성의 원형이다.
선생님의 창작탈을 두고 “큰 바가지는 눈이 엉덩이로 작은 바가지는 배때지가 웃고 있다 / 천재동의 바가지가 그렇듯이 / 밝은 날도 흐린 날도 / 절대로 절대로 울지 않는다”
라고 절창한 김춘수의 시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천재동씨가 보내온 낭자탈에는 마마 자국이 희미하다 / 마주보면 오늘 밤은 / 아내의 눈에 / 은하수의 별 하나 흐르고 있다.”
이에 빗대어 우리는 이렇게 적어볼 수 있다.
중국 중원(中原) 영양(潁陽) 천씨(千氏)의 만리(萬里)씨를 중시조로 하여 1600년을 원년(元年)으로 이 땅을 “선경으로 펼치지길 기원”하면서 한국땅에 터전을 일군 이래 17대(代) 후손 증곡(曾谷) 천재동은 1944년 11월 애국투사 서진문(徐鎭文)선생의 따님 서정자(徐湞子)와 혼인한 이래 63년을 밤마다 흐르는 은하수의 별을 곁에 껴안고 절대로 노하지 않고 절대로 절대로 울지 않는다.
선생님은 울산을 빛낸, 민속학자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1904-48)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와 더불어 울산사람이다. 그리고 나아가 동래를 빛낸 동래사람이고 부산사람이며 한국사람이시다. 1994년 결혼 60년기념 금혼식에서 부산의 카톨릭 센타를 빌어 천재동작 연출로 극단「도깨비」가 「중매소동」을, 탈 40점 토우 40점 민요풍속화 38점과 더불어 자제분 영배(英培), 영광(英光)씨, 그리고 사랑스런 제자 이석금(李石琴)씨 등의 찬조품 10여점으로 축하행사를 차리셨다. 20여년전 단독으로 「부산시민위안민속놀이잔치」를 개최하신 뜻의 연장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해방 직후 방어진의 양조복씨, 최용규씨와 함께 마련한 광복축하 3인 유화전을. 그리고 1963년 부산 최초로 아동극단 <갈매기>와 성인극단을 창단한 사실을. 우리는 또한 기억한다. 중국에서 「압록강 행진곡」을 작곡하고 항전가극「아리랑」(1940년)을 공연했으며, 헐벗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아동극을 이 땅에 주창하신 먼구름 한형석(韓亨錫1910~1996)선생님과 함께 한 1960년대 이후의 활동을. 그리고 영산줄다리기의 보유자 일봉(逸峯) 조성국(曺聖國1919~1993)선생님과 더불어 인간문화재의 권익과 참다운 전승문화창달을 위해 세운 「한국인간문화재총연합회」주최의 공연(1977년)에서 총연출을 맡으신 것을. 그리고 민족통일을 염원하여 백두대간의 줄기를 좇아 부산 금정산에서 올린 네 번째「민족통일대동장승굿」(1991년)에서 장승나무에 ‘민족통일대장부’, ‘민족평화여장부’ 글자를 아로새기며 대회장 일을 맡으신 것을.
이제 우리는 선생님의 소망을 풀어 실행에 옮길 차례가 되었다. 「바다를 건너가는 처용무」라는 선생님 희곡의 상연이 그것이다.
「바다를 건너가는 처용무」로 동아시아의 씻김을
천문이(千文伊)할아버지와 친척 변동조(卞東祚)아저씨에게 들은 바 처용랑은 가상의 인물이거나 아라비아인도 아니고 설화나 전설의 인물도 아닌, 울산 세죽마을의 실제 인물이라는 것이다. 왜구의 약탈에 맞서 어린 소년 처용이 역신이 아닌 왜구를 훈계하며 그에게 춤까지 가르쳤는데 그가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고 언약한 이야기를 널리 알리라는 당부이셨다는 것이다. 역신의 침입과 감복과 감화가 실제적인 상황이라는 것에 한편 놀라면서, 어쩌면 이러한 내용의 공연을 통해서라도 한일 관계의 역사적인 씻김과 치유가 수행될 수 있으며 이로써 동아시아의 평화와 유대를 기약할 수 있으리라 싶은 것이다. 이 처용랑의 가무행위는 현실적인 국제관계의 문화적 씻김인 동시에 아시아문화의 원초적 심성회복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마침내 선생님의 대륙적이면서 해양적인, 전통적이면서 현대적인, 한국적이면서 아시아적인, 정착적이면서도 유동적인 것들이 이중교호적으로 얽혀 넉넉하신 품성의 한 바탕을 이루신 것을 새로이 돋을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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