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광복 전 당시 축구공은 3호, 4호, 5호, 6호등으로 크고 작은 공들이 있었다.
시합 때는 4호로 정하고 가격은 2원이었다.
축구란 운동은 눈이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사시사철 어디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 한개만 있으면 운동할 수 있는 것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면 대회가 군 대회로, 다시 경남대회가 남선(南鮮)대회, 나아가서 전국축구대회로까지 발전해 갔다. 유명한 평양 백호단, 함흥 XX단, 마산 OB단이 이름 높았고, 선수 개인으로는 “ 진주 노랭이”가 유명하였는데 머리카락 색이 노랗다하여 사람들은 진주 노랭이라고 불렀다.
우리 어린 선수들은 노랭이가 되고 싶어 대회 때마다 옥시풀(Oxyful)로 머리칼을 감아서 노랭이가 되려고 하였다.
지금 추억해 보면 천진난만한 그 시절이 즐거웠고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보통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바깥세상의 다른 면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운동 분야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
볏짚으로 둥글게 만들고 거기에다 그물을 씌운 공을 논바닥에서 짚신발로 차면서 노는 공놀이를 보았고, 추석 때면 연중행사로 거행되는 장사씨름 대회도 관람하였다.
하기방학이 되면 귀향한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주최한 남선축구대회(南鮮蹴球大會)는 내가 축구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축구경기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더할 수 없는 기회가 되었다.
등교 길에는 상급생의 지도하에 이끌려 줄을 지어 갔지만 하교 길에는 15리 길을 자유롭게 행동하였는데, 또래아이들과 주먹만한 고무공을 몰아 차면서 돌아오곤 하는 것이 우리 어린이들의 즐거운 놀이이면서 기본축구였다.
당시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방어진 대표선수는 이광삼(李光三 京城培材), 옥태진(玉泰振 東萊高普), 천일동(千一東 釜山二商), 장덕기(張德基 京城二高), 김말봉(金末奉 大邱醫大), 이규대(李奎大 社員), 김재곤(金在坤 金融), 이기용(李基容), 김임득(金任得) 외 기타 선수들로 짜여져 있었다.
축구장은 그 옛날 자전거경주장 이었던 댕방우(大王岩) 섬끝 잔디밭이었는데, 시내 서진구 매축지(西津區 埋築地)로 옮겨졌다.
옥태진은 동래고보(東萊高普) 축구단의 주장을 맡아 맹활약하였으며, 우리 방어진 축구팀의 코치도 맡아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또한 코치 옥태진의 영향을 받아 우리 팀의 제복을 코치가 소속된 동래고보의 흑백 가로줄 무늬로 된 것과 꼭 같은 유니폼으로 만들어 입었다.
함경도 함흥(咸鏡道 咸興) 축구단에서 말하기를 “평안도에는 평양 백호가 있고, 경상도에는 얼룩 호랑이가 있다 ” 고 평할 정도로 방어진 축구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느 해 방어진축구단이 주최한 전조선축구대회에서 방어진 “얼룩 호랑이 ” 팀이 결승전에 올랐을 때 우리 동포들보다도 일본인들이 더욱 열광적으로 좋아하였는데, 그들은 청주(淸酒)를 통 째로 들고 냉주(冷酒)를 들이마셔 가면서, 북 치듯 술통을 마구 두드리면서 응원하는 광경은 볼만하였다.
결국 우리 방어진 팀이 우승을 하였는데 일인들은 자기들이 우승한 것처럼 기뻐하며 우승컵에 청주를 부어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배를 권하여 올리는 등 야단법석을 떨었다.
풍진난파 밑에서 /모인 우리들
배고픔을 한하며 /눈물 뿌리며
빈주먹을 마주잡고/ 앞을 나설 때
가슴속에 뛰는 피는/ 근하사(?)를 스치고
금수강산 삼천리에 /몸을 바쳐서
한풀이로 일하세/ 숨 쉴 때까지
노랫말이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우리 선수들과 동포들은 단기와 우승컵을 하늘 높이 들고 축하 시가행진을 하면서 노래를 힘차게 부를 때, 우리 소년들은 그 뒤를 따르면서 노래를 함께 불렀다.
위의 노래 제목은 『적포가(赤包歌)』인데 작사자와 작곡자도 모르고 내포된 뜻의 깊이도 알 수 없으며 누구든지 즐겨 불렀는데 아마도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면서 목청 놓아 부르는 노래였음이 틀림없으리라.
수년이 흐른 후에 우리 또래보다 서너 살 나이가 든 양조복(梁曹福)을 단장으로 한 방어진소년축구단이 결성되었지만 아직은 어리고 기술이 미숙하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내 나이 17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양조복을 비롯하여 이문규(李文圭),사덕선(史德先), 이몽호(李夢虎), 최임철(崔任哲), 김인출(金仁出), 이광호(李光浩), 박태주(朴台柱) 그리고 이발사 김씨, 센터링을 잘 한다고 하여 별명이 “호미 발” 인 일본 나막신 수리공 박씨, 농업학교 학생 박운종(朴云宗), 천재동 등으로 팀이 짜이면서, 유학생들로 구성되었던 방어진축구단 “얼룩 호랑이 ”팀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된 셈이 되었다.
우리는 매일 같이 나의 사형인 김임득(金任得)의 코치를 받으면서 연습에 들어갔다.
이 무렵 대 선수였던 이기용(李基容)은 함경도 함흥축구단의 초청에 의해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해가 바뀌면서 동면 축구대회가 울산군 축구대회로, 더 나아가 남선축구대회로 까지 발전되어 갔을 때 나는 주전 선수가 되어 등번호 2번을 달고 제비란 별명으로 종횡무진 뛰어 다녔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우리 팀은 명실 공히 대형 축구단으로 성장하였으며 방어진축구단이 주최한 전(全) 조선축구대회에 참가하여 우승도하였는데 당시의 우리 팀 진영을 말하자면 골키퍼 이발사 김씨, 수비에 주전(朱田) 이씨와 부산 영도 김씨, 부산 화가 우신출(禹新出) 그리고 이광우(李光雨), 공격수에는 김임득(金任得), 신장 오척 일촌에 별명이 목탁인 범어사 승려(梵魚寺 僧侶) 최학수(崔學守), 제비 천재동(千在東), 정구(庭球) 선수권 보유자인 황병곤(黃秉坤), 이기용(李基容), 잘 굴러다닌다 하여 붙여진 별명 다마고(달걀)인 부산의 김씨, 박운종(朴云宗), 외 생각나지 않지만 많은 선수가 있었다.
요즘 축구 전법은 보통 4·3·3 전법이니 3·5·2 전법이니 하지만 당시 우리 팀의 진영은 속백 2명, 겉백 2명, 하프센타 1명, 공격수는 전방 센타 1명을 중심으로 좌·우 2명씩 모두 5명이 횡으로 포진하고 있는 전법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약 보름동안 합숙훈련을 하는데
이때는 3가지 엄중한 규칙인 금주, 금녀, 금욕(禁浴)을 꼭 지켜야 했다.
그 동안 단련된 근육이 욕탕에서 풀려버린다는 이유로 금욕을 하는 것인데
냉수로 몸을 훔치는 방법이 고작이어서 모두가 허벅다리는 항상 곱지를 못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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