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86. 방어진의 곽암(藿岩: 미역 돌)

무극인 2009. 9. 25. 15:47

    방어진의 곽암(藿岩: 미역 돌)

 우리나라에 처음 온 일본 사람들이 크고 싱싱한 미나리와 부드럽게 너울거리고 6~7척이나 되는 미역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양식 미역을 보고,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과거 곽암에서 생산한 미역을 본다면 일본사람 못지않게 놀랠 것이다. 동해 남부 강동(江東), 방어진, 기장(機張)에서 생산되는 김이나 미역을 일본에서는 ‘우루산 노리(울산 김), ‘우루산 와까메(울산 미역)라 이름을 붙여 고가(高價)로 판매하는 실정이었다.

방어진 해역(海域)은 한류(寒流)와 난류(暖流)가 교류하는 곳인 관계로 풍어 해(豊漁 海)이다. 방어진 안만(岸灣)이 반월형으로 조성되어 있고 해심(海深) 또한 적당하여 일제(日帝)는 일찍이 대륙 진출의 여세를 몰아 어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방어진을 한반도 최고의 어항(漁港)으로 개척한 것이다. 오까야마깽(岡山縣), 시마네깽(島根縣) , 규쥬(九州) , 시고꾸(四國), 심지어 관동(關東), 관서(關西) 방면에서도 어민뿐만 아니라 일반 상인들까지 도래하여 하마네(邊: 현 南津 일대) 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신사(神社)를 세우고, 요지(要地)마다 일식(日式) 2·3층 목조 건물을 짓는 등으로 침탈의 야욕을 뻗치는데 우리네들은 가만히 있지를 않고, 백원할배, 고래네, 녹디(두)네, 대문 집, 갓 집, 봉태기네, 갓끈네, 천호방네, 지리이 최서방, 방아간 안씨, 꿀뚝밑 김생원, 황씨, 변씨 등등 원주민(原住民) 24집안의 대표 24명이 모여서 회의를 하여 결의된 중요 사항은 주로 각자의 소유 농지는 일인(日人)들에 넘어가지 않도록 할 것과 곽암을 사수할 것이고, 행정상 동· 서· 남· 북으로 지역을 구분하여 고락(苦樂)을 같이 할 책임자를 뽑았는데 동은 꿀뚝밑 김생원이 맡게되고 서· 남· 북 책임자도 뽑았다. 끝으로 중앙을 맡게될 적임자를 의논 끝에 거주지는 지리이 이지만 천(千)호방 네가 맡게 되었다. 그 후로 주민들이 동(東)은 촌(村)으로 하여 김촌(金村)네, 서(西)는 동(洞)으로 하여 황서동(黃西洞)네, ○남동(南洞)네, ○북동(北洞)네, 우리 아버지는 천중리(千中里)로 모두가 책임자의 성씨를 앞에 붙여서 오래 오래 택호(宅呼)로 각각 불러온 것이다.

미역 돌은 슬도를 비롯하여 볕바우, 지리이, 복지불, 삼섬, 꽃바우 등등에 산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최상으로 치는 것은 삼섬 미역돌이었다.

곽암(藿巖)은 원주민(原住民) 24집이 차지하고 있었고 돌의 규모와 미역의 질에 따라 단독, 두 집 혹은 세 집이 한 팀이 되어 관리하도록 하였고 해마다 제비뽑기로 결정을 하였는데 제비뽑기 시기가 되면 24집에서 대표 한 분씩 24명이 모여 술과 음식으로 즐기면서 풍년을 기원하였다.

동짓달 찬바람 속에서 전문가로 하여금 놉을 사서, 철제(鐵製)로 만든 갈개 판을 기다란 막대기 끝에 부착시킨 것을 가지고, 바다 속 깊숙이 몸을 담그고 곽암 표면에 붙어 서식하는 조개딱지, 해초 같은 기생물(寄生物)들을 깨끗이 긁어 없애는 ‘갈개질을 시키는데 이는 떠돌아 흘러 다니는 미역 포자(胞子)가 돌에 잘 붙게 하기 위해서이다.

갈개질 하는 전문가가 엄동(嚴冬)에 옷을 첩첩이 끼어 입고, 머리에는 수건을 감싸 두르고, 하반신을 물 속에 담그고, 긴 갈개 장대를 수심 깊이 넣어서 바위 표면을 슬금슬금 깎아낼 때 수면 위의 상반신이 움직이는 모습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설날 제상에 올리는 미역나물은 시기적으로 이르고 본격적인 수확기는 음 2월 하순에서 3월 말까지이다. 미역 캐는 방법은 전마선을 타고 낫을 부착시킨 긴 장대를 물 속 깊이 넣어서 미역귀가 붙어 있는 뿌리쯤에서 잘라 걷어올린다. 이때 6~7척이나 되는 잘 성숙한 미역이 어린아이 머리통 만한 오골오골한 미역귀가 달린 체 올라오면 수확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거니와 구경꾼까지도 좋아들 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뭍에 올려진 미역은 즉석에서 첩첩이 쌓아 단을 만들고 볕에 말리게 된다. 우리 집 경우에는 갈개질이나 수확 때에는 주로 해녀 십 수명을 고용하는데, 육고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반찬과 오곡밥, 조밥 두 가지로 풍성히 대접한다. 해녀들은 좋은 반찬과 오곡밥은 자기 식구들에게 보내고 조밥과 육고기를 많이 먹는다. 조밥과 육고기를 많이 먹는 이유는 소화가 더디고 무게가 있기 때문에 물 속 출입이 용이하고 물 속에서 오래 견디는데도 좋다는 것이다.

일제(日帝) 치하에서 택지도 농토도 그들에게 많이 착취당하였지만 곽암만큼은 끝까지 우리 손으로 지켜왔는데 조국광복을 맞이한 얼마 후에 바다는 국유물(國有物)이라 하여 정부에서 몰수하고 말았다. 그 후로 곽암을 지키는 사람도, 애써 가꾸는 사람도 없어지고 그 질과 양을 자랑하던 방어진 미역에 대하여는 전설로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