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84.“동래학춤” 발굴은 이렇게

무극인 2009. 9. 25. 14:14

 

        동래학춤은 이렇게 발굴되었다

 생전에 백색바지, 흰 구두, 분홍색 윗저고리를 즐겨 입은 멋쟁이 김희영(金熙英, 동래야류 넷째 양반예능 보유지정 직전에 사망)이 활보하고 다닐 때 동래학춤은 발굴이 시작되었다.

동래 토박이인 김희영은 학춤에 고명한 김기조(金基祚)선생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에게 계승되어 오던 춤을 전수받았으며 전 가족은 물론 외손녀까지도 학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춤은 도포차림에 갓을 쓰고 우아하게 춤추는 모습이 학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하여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학춤’이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대 당시 김희영은 지병(持病)으로 인하여 몸이 몹시 쇠약한 나머지 이 학춤에 대한 열정이 식어가고 있는 중이라 춤사위나 전개과정이 누가 보아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대로 방치하면 아까운 문화유산 하나가 전설 속에 묻혀질 것만 같아서 김희영에게 도약하여 재정립할 의사를 타진한바 기뻐하며 ‘좋았어!’하고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김희영은 맘에 드는 일에는 곧잘 ‘좋았어!’란 단어를 잘 썼다.

김희영은 심기일전하여 부족한 면은 다시 기억을 되살리는 등 재정리하는데 크게 애썼다.

쌍무(雙舞)로 발굴할 것이냐, 독무(獨舞)로 발굴 할 것이냐 양론이 대두 되었을 때, 하루는 協會事務所 아래 鐘茶房에서 내가 이런 意見을 提議했다.

 “우리가 많이 보아온 옛 그림에 보면 한 쌍씩 짝을 지어 한 마리가 나르면 한 마리는 앉아있고 한 마리가 쳐다보면 한 마리는 내려보는 조류(鳥類) 그림을 볼 때 정감도 가고 통일감도 있어 짜임새가 있는 것과 같이 獨舞 보다는 雙舞로 발굴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했더니 마침 김희영이 ‘내 여동생(당시 모 은행장의 부인)과 그의 딸 향경(鄕卿)양도 다 같이 학춤을 춘다.’고 해서 쌍무로 발굴될 듯 했으나 이 때는 이미 독무를 주제로 하여 S씨가 많은 진도에까지 이르러 발굴 되어 있는 상태여서 하는 수 없이 쌍무는 무시되고 말았다.

당시 민속보존협회 사무실은 복천동 희다방이 있던 건물 3층에 있었고, 주로 2층 희다방에서 많은 협의가 있었는데 발굴현장은 다방건물 뒤쪽에 있는 ○○여관방(115호실) 방 한 칸을 빌려서 김희영의 고증과 포즈로 서국영은 글을 쓰고, 천재동은 무보(舞譜)를 그렸다.

이렇게 완성된 보고서 105호(등록번호)가 문화재 관리국에 비로소 우송된 것이다.

이 발굴내용과 무보에 준하여 S 교수가 연출을 맡아 연습을 거듭해 오다가 여의치 못한 이유로 S 교수가 협회를 떠나게 되었다.

후임으로 野遊 연출 원래 책임자이신 辛佑彦先生에게 돌아갔는데 선생은 千在東을 대역 시키겠다 하여 野遊, 地神밟기, 鶴춤 세 종목을 내가 책임지게 되어 이후 30년을 지켜온 것이다.

연희자 들은 전과 달리 적극 나서주었다.

千在東은 총 연출자로서 30년의 긴 세월을 연희자 들과 희노애락을 같이 한 것이 정말 역사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 30년간 연희 전수자들은 3세대로 바뀌어 많은 세월이 흘러갔건만 千在東만은 여전한 모습 그대로의 자세로 연출에 임했던 것이다.

훗날 안 사실이지만 이 105호 조사 보고서에는 동고동락한 무보작성자의 기록을 빼고 S씨 단독 발굴로 보고되었고, 또한 보고서를 개인 혹은 각처에 배부하면서도 천재동에게는 한 권 보고서(報告書)를 주기는커녕 한 마디 인사도 없었다.

역사 속에 영원히 전설로 묻혀질 뻔한 동래학춤이 오늘 날 전승(傳承)되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다.

 

 

참고 : 2002년 7월 31일 수요일, 소나기가 몹시 내리던 오후 3시경 기장 교리에 거주하는 S씨는 자택을 찾아든 방문객에게 실로 30년 만에 ‘비로소 밝히겠다’면서 자필로「무보작성 천재동」이라고 써준 105호 조사 보고서 복사물이 비로소 내손에 건네 온 것이다. 책자 「동래들놀음」에 실린 내용 중에 “김희영이 동래학춤보유자로 지정되기로 되었으나 지정 전에 사망으로 취소되었다”는 것은 왜곡(歪曲)된 것이다. 사실 김희영은 동래학춤 조사서가 문화재 관리국에 보고되기 전에 이미 사망했고, 학춤 보유자로서가 아니라 동래야류 넷째양반 역으로 신청 한 것이다. 또한 최근에 와서 동래학춤을 제3의 인물 M씨 자신이 발굴, 등록 했다고 버젓이 어느 지역지(地域誌)에 기사로 보도 되어있는 것을 읽고 나는 놀랐는데 이는 사실이 아닌 거짓임을 천하에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