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특설(特設) 인체과로
다이해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의 입학시험은 석고 소묘였는데 간단하였다.
학교는 네모반듯한 백색 건물이고 조그마한 운동장 북편(北便)에
평옥(平屋)의 일본화(日本畵)를 공부하는 교사(校舍)가 있었고,
교무실에 들어섰을 때 본교 설립자인 나까모라 후세츠(中村不折)가 그린
남성 나체 그림 2점이 눈에 띄었다.
밤낮 석고상만 들여다보면서 목탄으로 소묘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과거 도고 세이지(東鄕靑兒: 1897~1978)가 사사(師事)하는
실기 수업 반에 들어가고 싶어 고심하고 있던 중에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특설(特設) 인체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당장 천단(川端)으로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천단은 학교라기보다는 거대한 미술학원(美術學園)이다.
매일 같이 몇 백 명의 미술 지망인 들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일본(日本)에서 화가가 되려면 천단(川端)을 거쳐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특히 특설 인체과는 정원이 18명으로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먼저 석고 소묘과에 들어가서 공부하면서 특설 인체과에 들어갈 기회를 살피기로 하였다.
마침 별명이 “호꾸리꾸(北陸)”라고 부르는 사무원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마음씨가 착하고 매우 친절하였다.
가끔 학교 사정에 대하여 그에게 묻기도 하면서 그와 더욱 친숙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환심을 샀다.
하루는 지도교수 호수(虎首)께서 나의 소묘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자네! 석고상은 석탄이 아니야! 그러나 데생력은 대단하구나!”
칭찬하면서 석고 소묘과 야간부 조교(助敎)역할을 하겠다면 그 대신에
특설(特設) 인체과에 들어가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쉽게 인체과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호꾸리꾸(北陸) 덕택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인체과(人體科)는 본동(本洞) 건물의 2층에 있었는데 휘 넓은 교실에 모델대가 중앙에 있고, 아득하게 높은 천정에는 유리로 하늘을 가렸으며 커튼으로 태양 광선을 조정하게 되어 있었다.
창문마다에는 길게 비로드 천으로 늘어뜨려 외부 광선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18명이 정원이었는데 그 이유는 모델의 정면과 측면(側面) 등 둘러앉아
빠짐없는 인체구조를 그리는 데는 18명이 적정 인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일본명(日本名)이 없다. 본명 천재동(千在東)으로 통했다.
때로는 중국인(中國人)으로 오해받기도 하였는데
일어(日語) 발음이 사국인(四國人: 일본의 한 지명)발음 같다 해서
“지아리(千在)야쯔마(東)”라고 불려서 쓴웃음을 짓기도 하였다.
(가와바다화학교 조교 당시 천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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