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탈전에 부쳐
증곡 천재동씨는 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된 「동래야유」의 기능보유자의 한사람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놀이에 필요한 탈(假面)제작이 그의 남다른 솜씨이다. 금년 66세의 천씨는 인간문화재들이 일반적으로 학벌이 낮은데 비하여 정규 미술학교 출신 일뿐만 아니라 이번 12번째의 개인전을 갖는다는 점에서 탈제작 분야의 독보적인 작가이다.
증곡은 그 동안 한국의 재래 탈들에서 힌트를 얻어 무수한 민족적 가면을 창작해 왔다. 한때는 토우형태의 테라코타 소품에도 열중한바 있으며 개중에는 외국인과 혹은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을 통해 구미까지 적지 않게 흩어져 나갔다. 이점 그는 동래지방의 보배로운 작가이지만 서울에서는 어엿하게 발표전을 가질 기회가 마련되지 못해 아직도 그의 명성이 재야에 묻혀있는 형편이다.
그가 만든 탈에는 더러 종이와 나무 제품도 있지만 거의가 바가지탈이다. 요즘에는 플라스틱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바가지가 희귀해 졌지만, 이 바가지야 말로 과거 한국적 풍물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증곡은 바가지가 탈을 만드는데 가장 한국적인 재료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사실 바가지는 가볍고 형태가 대소 다양하여 탈을 형상화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千씨는 단순한 탈장에 거치려하지 않고 한국인의 생활감정으로 바가지라는 재료를 통하여 시대감각의 조형으로 투영시켜서 남이 추종하기 어려운 경지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본시 탈은 영물적 존재로 쓰이는 도구이었으나 오늘 날에 있어서는 예능의 중요한 도구로서 정립된 하나의 미술작품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대중의 탈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그는 온갖 노력을 경주해 왔다.
일본의 태평양미술학교와 천단화학교에서 수학한 증곡은 다시 서울의 국민극연구소와 동경의 유락좌에서 연극을 공부한바 있다. 해방 후 학생극부터 시작하여 성인극단을 조직해 부락순회 계몽공연을 벌리는 동안 탈극을 시도한 것이 그만 탈에 집념을 쏟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탈극은 각본 ․ 장치 ․ 소도구 및 연출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자력으로 이끌어감으로써 탈세계의 오묘한 흥취에 한층 몰입하게 된 셈이다.
증곡이 동래야유에 관련하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라고 하지만 일단 그에 심취한 연후에는 연희본의 정립에 성공했고, 그 들놀이의 앞놀이와 뒷놀이 및 거대한 규모의 길놀이 등을 발굴 복원하는데 다시없는 공헌을 했다. 또 동래의 학춤과 지신밟기, 그리고 동래오동풍악놀이 의 재현 등 그의 관심은 끊임없이 천착하고 확대 되어가는 느낌이다. 물론 그의 최대의 과제는 현존하는 동래야유탈의 부실한 점을 보완해 그 원형을 복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모든 탈들이 개성을 뚜렷하게 되찾을 수만 있다면 동래야유는 지금보다 훨씬 발랄하고 싱싱한 민속놀이로 탈바꿈이 될 것이다.
증곡의 창작 탈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일련의 작업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고유문화의 계승 내지 재현에 그 미학적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고위금용이라는 말 그대로 옛것을 본보기로 삼되 새로운 정신으로 개척해 나가려는데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가 부산에서 첫 개인전을 연 1965년 까지만 해도 재래식 수법을 답습이었다. 바가지 반쪽에다 눈 ․ 코 ․ 입 같은 부분에만 구멍을 뚫고 종이를 짓이겨 붙이거나 나무쪽을 깎아 붙여서 콧날과 입술을 불거지게 입체화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후 덧붙여서 표현하던 바가지탈의 기존 개념을 깨뜨리고 바가지의 거죽에 직접 조각을 시도했다. 결과적으로 성공하였으며 이 조각의 효과는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다.
70년대의 작업은 조각 수법에서 한걸음 발전시켜 3단계의 기법을 시도해 보았다. 부착물에 조각을 곁들이는 한편 바가지 자체의 필요한 부분을 오려내어 제자리에 도로 돋워서 붙임으로써 더욱 돋보이는 효과를 얻어냈다. 그리고 다시 이 모든 기법의 종합적 응용으로써 그의 4단계 작업으로 확대해 쌓아 올리고 있다.
탈의 일반적인 공통점은 적당한 생략과 과장된 표현을 통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프리미티브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유머와 위트로서 집약되는데 이번 증곡의 작품들은 보다 리얼하게 표현함으로써 어떤 위압감 보다는 한결 친근감을 자아내게 하였다. 작품전의 명칭을 「소면만복전」이라 한 것도 「소문만복래 소지황금출」의 춘첩자 문구를 본떠서 웃는 얼굴에 복이 깃들도록 호소하려는 의도가 짙다. 따라서 이번 출품되는 50여 점은 「복탈」이라 할만하며 소박한 일상생활의 기구(祈求)가 담긴 것이기도 하다.
증곡의 소박한 인간으로서의 진면목을 탈에 담긴 웃음과 즐거움만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20년 가까이 심심풀이로 제작하는 토우에 너무도 역력히 드러나 있다. 그는 의례 토우의 주제를 동요와 민요에 찾아내어 빚고 있어서 그것들은 바로 그의 향수어린 서민상이요 자화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벨 하나 공공
나 하나 공공
뉠모래 동동
혹박 사레 가는 날』
이는 제주도 사투리가 그대로 섞인 별에 관한 동요이다. 커다란 호박을 이고 가는 이 촌부는 반드시 제주도가 아니라도 좋을 만큼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던 한폭 풍속화이다. 그가 탈춤 속에 담긴 일반 서민의 생활 감정에 심취해 탈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듯이 마찬가지로 그는 쓰러져가는 한국적인 정경이 못내 아쉬워 토우들을 만든다는 자변이다.
『우물가엔 나무형제
하늘에는 별이 형제
우리 집에 나와 언니
나무형제 열매 맺고
별 형제는 빛을 내니
우리 형제 무얼 할꼬』
영남지방의 이 「우리형제」동요는 비록 어린이들일망정 우애 두터운 형제의 표상이다. 또 귀염둥이 동생을 어깨위에 목마 태우고 「둥개야 둥개야」노래 부르다가 그만 바지가 아래로 내려앉는 순간을 포착한 광경은 차라리 기발한 체험담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것들이 어찌 창작품이 아니고 무엇이랴. 현대의 이른바 순수미술을 주창하는 작가들 중에는 바가지탈이나 조그만 토우들에 대하여 짐짓 부정적인 견해를 펼는지 모르겠으나 만약 그렇다면 옹졸한 자기비하의 편견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증곡의 작업은 일제에서 싹튼 것도, 서구에서 이식해온 것도 아니며 우리의 오랜 역사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미의 뚜렷한 한 부분인 것이다.
그의 제작활동은 한동안 딜레마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좀더 무르익은 경지의 秀品들로 일관하지 못하는 터이나 그의 성실과 열의는 놀라운 것이며 그래서 앞으로 한국미의 한 커다란 줄기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1980년 이월 일
문화재전문위원 이 종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