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이기우 문화예술기획가 | | |
센텀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완벽한 100’을 뜻한다. 100년 후의 울산을 위해 과연 우리 울산인들은 어떤 비전을 품을 수 있을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문화다양성은 개인과 사회의 풍요한 자산으로서 이를 보호·증진·유지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세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필수요건”이라고 했다.
울산 출신 최현배, 송석하, 정인섭, 오영수 선생은 이미 100년을 넘어섰지만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은 숨어있는 몇몇 거장이 있다. 울산 문화예술 교육의 뿌리이자 그 스승인 증곡 천재동이라는 인물이 지난 1월25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이했다. 다가올 11월25일은 현대 창업자 아산 정주영 회장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뿐만 아니라 몇 년 후에는 김병희 선생이 이어진다.
이렇듯 알려진 인물들의 활동은 근현대를 거치면서 문화적 기반이 전무했던 고향 울산을 벗어나 타지에서 꽃을 피웠던 분들이다. 이 분들에 대해 향후 울산의 정체성, 미래를 위한 울산문화의 비전을 위해 지금이라도 문화산업 100년 대계의 지표를 세우기 위한 그 단초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울산의 역사적인 인물들 가운데 특별히 발굴되고 크게 띄워야 할 훌륭한 인물이 있다.
울산역사의 숨어있는 문화예술의 효시라 할 증곡 천재동 선생. 천재동은 모든 문화예술 장르를 총망라한 그야말로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 기능보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페스탈로치 정신을 존중한 교육가이면서도 창작 탈 제작가이자, 화가, 토우 제작가, 연극인, 민속예술가였다.
광복 후 천재동은 방어진초등학교와 방어진중학교 교사 시절 탈을 이용한 연극 및 뮤지컬로 민족계몽운동, 반일·반공 운동을 펼쳤다. 교육상 정립과 극화수업 및 쾌도걸이를 고안해 문화예술적 요소를 도입한 독특하고 효과적인 교육법으로 교육의 질을 향상시킨 인물이다. 교사로서 드물게 시범공개 수업을 통해 그 명성이 쌓이며 울산초등학교에 이어 전포·토성초등학교 등 울산과 부산에서 25년간 후학을 가르쳤다. 1931년 16세때 그는 울산 최초로 연극 ‘부대장’을 무대에 올린 이래 연극과 미술의 꿈을 이어나갔다. 방어진초등학교 교사 시절, 아이들이 참여한 그의 연극 ‘박제인간’은 마을별 순회공연으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방어진 철공소에 연극 공연장을 조성해 한국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연극 ‘남매의 비극’을 무대에 올렸다는 것은 오늘날 한·일관계 외교문제의 화두가 되어온 위안부 문제를 가장 먼저 문화예술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또 다른 연극 ‘두 마리의 당나귀’는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천재동은 그 외에도 한국 최초로 창작 탈 전시회와 울산 최초로 미술전람회를 열었다.
창작 탈 전시회를 계기로 그는 동래야류와 민속예술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동래부사 송상현 행렬의 도해화, 부산의 3대 민속예술인 동래야류, 동래학춤, 동래지신밟기의 연출가, 부산민속박물관 초대관장을 역임했다. 특히 고향 울산의 지신밟기의 원형으로 동래지신밟기를 고증해 부산시 지정무형문화재 제4호로 등재시켰듯이 평생을 예인의 삶을 사셨다.
근간에 천재동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그의 부인 서정자 여사와 인간문화재를 물려받은 아들 천영배 선생은 울산에서 증곡 천재동 기념관 조성을 염원, 수많은 작품과 유품들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사업을 부산이 선점하기 전에 고향 울산이 유치해야 하는 당위성은 천재동이 울산인으로서 울산의 얼과 정서를 담아왔고 울산으로의 귀향을 꿈꾸어 왔기 때문이다.
울산대교 개통 100일을 축하해 마땅하지만 정작 역사 문화적으로는 증곡 천재동만큼 드러내 자랑할 만한 울산의 문화예술인의 다리는 없다. 안타까운 것은 증곡 천재동의 생가터를 복원해 마땅함에도 머지않아 그의 생가터가 헐리게 될 위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지켜보기만 해야 한단 말인가!
울산 최초의 문화예술계 거장이 남긴 역사의 증표로서 그의 생가터는 보전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을 담을 공간임에 틀림없다. 귀중한 천재동 생가터가 도시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아파트 업체에게 넘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를 우리는 방관하고만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기우 문화예술기획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