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靈山) 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
2003년 3월 28일(금요일)자 국제신문, 『소처럼 걸어온 '나무소' 한평생.』 〈이 사람의 삶〉. 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 영산쇠머리대기 기능보유자 김형권씨의 《공수래공수거 인생, 전통계승 보람》기사를 읽고, 1970년대 영산 「3. 1 문화 향상회」의 초청으로 영산을 방문하여 25호인 「영산쇠머리대기」와 26호인 「영산줄다리기」 두 가지를 관람하였을 때의 일이 생각이 난다.
영산에 도착을 하자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이 김형권 보유자가 경영하는 여관인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그 여관방에서 지역 유지들을 소개를 받고 인사를 나누는 중에 끝까지 평좌 자세로 유난히 나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던 제26호 영산줄다리기 보유자 조성국도 소개를 받고 처음 알게 되었다. 김형권 보유자의 배려로 여관 특실에서 자고, 다음날 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를 차례로 관람하였는데, 잎이 그대로 붙어있는 대나무 장대에 수십의 오색 깃발이 풍악에 맞춰 공중에서 바람을 가르며 나부끼는 광경은 나에게 특별하고 강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나는 우리 고유민속놀이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을뿐더러 관계하는 전문위원은 더욱더 아니요 한사람의 구경꾼에 불과하지만 두 가지 조언을 하고 싶은 생각에서 첫째로 ´쇠머리대기는 어디까지나 민속놀이로서 민중들 축제의 한마당인데 소매를 걷어 올린 서민들이 주체가 되었으면 좋겠고, 굳이 민관일체로 구성되어야 한다면 쇠머리에 올라선 연희자가 조선시대말엽의 서구식 복식 차림인 데는, 이 놀이의 역사가 짧아 보이는 것은 물론 우리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느낌이 들기 때문에, 우리 고유의 전립(戰笠)에 우리 괘자(掛子)로 장식한다면 격식에 맞지 않을까?´하고 나의 의사를 이야기한 바 있었는데 훗날 어느 대회에서 전립에 괘자 차림으로 바뀐 것이 놀이에 잘 어울리고 하여 기뻤다. 나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인지 아닌지는 김형권 보유자께서는 아시리라…
두 번째는 제26호 영산줄다리기에 대한 것인데 동․서부의 우람한 줄이 길게 누워있는 적당한 곳에 망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망대 위에 갓 쓰고 두루마기를 걸친 사령관이 버티고 앉아있고, 역시 같은 차림을 한 심판자가 기다란 잣대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분위기가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고유민속놀이에서 어색하다고 생각되어 나의 의견을 말한바가 있다. 즉 내가 알기로는 본래부터 우리 민속놀이에는 자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서양의 과학 문화처럼 세심하게 잣대로 흑 백을 가리지 않고서도 좌우를 구분할 수 있으니 형식에 너무 치우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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