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곡에 대한 신문기사

예술촌의 명암

무극인 2019. 9. 4. 02:41

부산일보

[작가 최해군 나의 교유록] 남포동 그날 그 사람들 <7>입력 : 2003-09-29 11:18:13수정 : 2009-02-19 18:08:29게재 : 2003-09-29 00:00:00 (30면)

예술촌의 명암

천재동

시대의 흐름이 촌각(寸刻)을 다투는데 시류를 앞지르는 남포동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다. 문화인이란 그들의 탈속(脫俗)의 낭만도 그날의 멋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이름도 잊어버린 그날의 대폿집도 전자상품점으로 바뀌고 그날의 통술집은 양품점으로 바뀌었다. 그날의 얼굴들도 흩어진 지 오래다. 
타칭이건 자칭이건 문화인이란 그들은 문화다 예술이다 하며 제멋에 흥겨웠다. 그 흥겨움에는 그 무엇이 있었을 게다. 막걸리잔을 앞에 놓고 주고받는 헛된 소리,그 헛된 소리는 세속에서 멀어졌다 해도 쥐어보고 건져볼 씨알도 간혹 있었을 게다.
남포동이 오늘날의 현실로 돌아온 건 80년대,그쯤부터일 것이다. 그 현실은 실리를 앞세웠다. 몇 평 안 되는 자리에 타칭 자칭의 문화인이 명태포와 마른 오징어로 두시간도 좋고 세시간도 좋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면 주인은 저부가의 생산성을 생각했을 게다. 그건 고부가가치를 요구하는 상도(商道)에는 맞아들지 않는 희생이요 봉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한집 두집 문화인을 외면하자 그들은 발붙일 자리를 잃었다. 거기다 또 다른 현실이 있었다. 시내 여러 지역으로 대학가가 생기고 그 대학가가 새로운 문화가를 형성해 갔다. 이는 바람직한 일로 문화의 확산이요 순리라 할 수 있다. 
그건 한 문화기관에서 그 기관 나름의 문화가 형성되는 것으로서도 알 수 있다. 남포동 문화를 되돌아본다. 국제신보(현 국제신문)가 동광동에서 남포동 입구로 52년 사옥을 옮겼다가 59년에는 중앙동의 국제회관(옛 MBC 사옥)으로 옮겨서 신군부정권에 의해 80년에 폐간될 때까지 남포동 주위가 생활권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국제신문이 남포동 문화를 형성하는데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폐간 이전의 국제신문에는 문인이 많았다. 생각나는 대로 들어보면 이병주(李炳注·소설) 이형기(李炯基·시) 조영서(曹永瑞·시) 최계락(崔啓洛·아동문학) 구자운(具滋雲·시) 허천(許天·수필) 정영태(鄭永泰·시) 김규태(金圭泰·시) 임수생(林秀生·시) 배승원(裵勝源·수필) 최화수(崔和秀·소설) 들이었다. 문학인만이 문화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도 알게 모르게 남포동 문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남포동으로는 범(汎)예술인들이 어울렸다. 서양화에는 김종식(金鍾植) 임호(林湖) 추연근(秋淵瑾) 김원(金原)들이 보였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이웃 예술인들과 자연스레 미술의 근황이 얘기되었다. 연극계의 전성환(全盛煥) 설상영(薛相英) 여수중(呂樹中)들도 간간이 얼굴을 보이고,음악의 유신(劉信) 고태국(高泰國) 제갈삼(諸葛森)들도 때때로 알음을 찾아와서 자리에 어울렸고 무용의 황무봉(黃舞峰) 김향촌(金鄕村)들도 부산이 가진 현대무용의 어려움을 토로하고,탈과 토우(土偶)와 아동화(兒童畵)의 천재동(千在東)은 탈이 가진 멋을 지칠 줄 모르고 얘기했다. 그게 예술계가 가진 자연스러운 분위기요 어우름이었다. 
거기에 천진으로 사무사(思無邪)의 서정시인 천상병(千祥炳)이 문인들 자리를 찾다가 들어서면 새로운 충동을 일으켰다. 
그때는 누구없이 호주머니 사정이 약했다. 목로주점 같은 그런 대폿집이 고부가가치의 점포로 밀려나자 제각각 호주머니 사정에 맞아드는 지역으로 흩어져 갔다. 
그러나 문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뿔뿔이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남포동에 문인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요산 김정한의 소설 제목을 딴 술집 '모래톱의 집'이 생기고 '양산박'도 생겼다. 만남의 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양산박은 두 곳이나 생기기고 했다. 
그러나 시류를 앞지르는 남포동이었다.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고부가가치 속에 저부가가치가 지탱할 수 없었다. '남포동 그날의 그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에 뒤따라 다니는데 지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을 헤아리니 이미 이승을 떠난 사람이 많다. 그래서 스스로 '그날 그 사람'이란 제목을 무의식 속에서 붙였던가? 추억이란 보랏빛 그리움이라 한다. 그날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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