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2. 천재동의 가장행렬

무극인 2008. 3. 17. 22:15
 


* 천재동의 가장행렬

1967년 어느 날 한원석 민속보존협회 회장이 갈 곳이 있다면서 나를 안내하였다.

 안내되어 간 곳은 용두산공원(龍頭山公園) 기슭에 있는 어떤 여관이었다.

여러분이 벌써 와 있었는데, 부산대(釜山大), 동아대(東亞大), 교육대(敎育大)의 미술 교수들이었다.

이렇게 모인 사연을 비로소 알 수 있었는데,

서독(西獨) 뤼브케 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한다는 얘기와

방문시 환영행사의 내용과 행사방법 그리고 행사준비 관계 등을

 의논하고 각자 맡을 일 분담을 위해 만든 모임이었다.

 교수 측은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정발(鄭發) 장군,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 등의

초상화를 그려 요지에 있는 육교마다 게시한다는 것이고,

 한 회장은 나와는 사전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회의석상에서 하시는 말씀이

“ 내 동생(韓亨錫 당시 부산대교수)과 천재동 둘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 면서

자신 있게 일을 맡아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민속예술협회 측은 길놀이를 맡게 된 것이다.

 나의 실력을 믿고 맡기는 것에는 고맙게 여기나,

길놀이의 성격이 그렇게 호락호락 쉬운 것은 아니어서

앞으로의 고생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뻔한 일임을 나는 꿰뚫어 예측할 수 있었다.

구상, 제작, 인원동원, 지도 등 진행 과정에 있어서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은, 굶주림과 고통에 시달렸지만

 더 어려웠던 것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인간적인 외로움이었다.

한 회장 말씀은 내 동생 먼구름 (한형석 교수의 아호)과 천재동 둘만 있으면

 무슨 행사라도 할 수 있다 해서 두 사람에게 일임했지만,

 먼구름 한 교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길놀이의 뼈대부터 잡아가야 된다면서

 나에게 일임하였다.

결국 내 혼자서 모든 것을 떠맡게 된 것이다.

 나는 부산의 상징을 용두(龍頭)에 두고,

 한 마리 용을 연상하여

머리에서 꼬리까지 무엇으로 어떻게 상징적으로 나타낼 것인가에

길놀이의 초점을 맞추어서 문제의 열쇠로 삼고

각 종목에 따른 형상을 계획에 따라 하나하나 그림으로 그려 나갔다.

우리 풍악대(風樂隊), 태극기대(太極旗隊) 및 시기대(市旗隊), 군기대(軍旗隊),

대고대(大鼓隊), 장승출동대(長承出動隊), 동래야류대(東萊野遊隊),

그리고 우리의 고유 의상을 입은 남녀노소 행렬 인원 500명을 기준 삼아

이 엄청난 계획과 함께 계획도를 완성 해내었다.

당시는 요즘과 같이 우리풍악 놀이꾼도 별로 없었고

 대소 가장 행렬에는 죽재(竹材)와 합판(合板)외 재료가 흔하지 않았으며,

또한 제작 면에서도 매우 까다롭고 어려움이 많았다.

 나의 계획도를 살펴 본 한 교수는

 용머리가 요란한 풍악 소리에 맞춰서 상하 좌우로 움직이고

따라서 깃발도 함께 나부껴서 생동감마저 있어서 좋으며

용꼬리 뒤에는 장승을 앞세우고 일반 춤꾼들을 따르게 한 것이 잘 되었다면서,

 또한 그 뒤로 오방신장(五方神將) 출동을 가미 하자는 데 동의하여

 최종 결정을 보았는데,

 김타업(金他業)의 의견을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다.

 추가된 내용은 즉 소달구지에 초대형 북을 싣고 북소리를 크게 울리자는 것인데

오방신장(五方神將)앞에 위치를 정하기로 결정하였다. 


* 고마운 김타업(金他業)

김타업(金他業)은 다방면에 재주가 있는 나와는 둘도 없는

 민속놀이 계의 친구로서

 제68호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第68號密陽百中놀이藝能保有者)인데

 예명(藝名)이 김광파(金光波) 이다.

그는 1913년 생으로 나 보다 2년 선배이다.

젊은 시절부터 이름 그대로 풍악 잡이로

 유랑생활(流浪生活)했으며,

 한때는 이름 있는 여성국악극단장(女性國樂劇團長)으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잡이 실력에 있어서는 궁중무(宮中舞), 궁중악(宮中樂)에 능숙한

이동안(李東安 제79호발탈 예능보유)도 그의 빼어난 재능에 감탄할 정도였다.

하보경(河寶鏡), 김상용(金尙龍), 권씨형매(權氏兄妹) 등

밀양의 백중놀이 보유자들을 앞장서서 이끌어 온 김타업(金他業)이다.

밀양(密陽)『백중놀이』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병신굿놀이』연희본을

김타업 부탁으로 내가 써 주기도 할 정도로 김타업은

나와 마음이 잘 통하는 관계였다.

김타업은 고유의상, 소도구 제작에도 기능이 우수하기 때문에

이번 행사 준비에 도움을 받기 위해 특별히 부탁하였더니 마다 않고 단숨에 달려와 주었다.


* 본격적인 작업으로

이제 모든 형체들의 뼈대가 구상된 단계에 당도하여

한 교수, 김타업, 천재동 세 사람은 일을 분담하기로 하였다.

 한 교수는 오방신장, 장승 등 일곱 쌍 형체를 죽세공으로 만들 것과 오방신장 의상 만들기,

 김타업은 기타 의상, 전립(戰笠) 등 모든 관(冠)과 기타 필요한 대소 도구 만들기,

 나는 탈, 군기(軍旗)그리고 오방신장, 장승 등 모든 채색과 마무리 작업,

 연출, 총지휘, 이렇게 일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한형석 활동 처는 충무동과 국제시장,

김타업과 천재동은 동래고교(東萊高校) 뒤뜰 노천하(露天下),

 김타업은 공급받은 원단과, 가지고 온 화로, 인두, 관의 형틀,

 재봉에 필요한 도구 일체 등등들을 맨 땅바닥에 차려놓고 작업을 하였는데,

이 일은 당연히 실내에서 작업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는 인색하게도 장소 한곳 배려해 주기는커녕

누구 한사람 얼굴 한쪽도 내 보이질 않았다.

 나는 수일간 부산대학교 도서관을 왕래하면서 채록한 군기(軍旗)도안을

노천 김타업 옆에서 판자 위 종이에다 실물 크기로 확대하는 작업을 하면서도,

 초청되어 온 김타업에게 자꾸만 미안한 생각 들었다.

왜? 변변한 장소 하나 없이 밖에서 재봉 일을 해야 하나?

지금 생각하여 보면 그때 우리는 너무 순진했다.

 거기에다 점심도, 물 한잔도 없이 매일 매일 작업이 연속되었다.

그러던 중 국기도안이 완성되어 염색공장으로 가고,

 김타업이 만들어 내는 수백 개의 전립(戰笠), 쾌자(快子),

수십 개의 정자관(程子冠)이 척척 작품이 되어 나온다.

드디어 열여섯 자 높이의 오방신장과 열 두자 높이의

 장승 죽제(竹製) 골격(骨格)이 운반되어 왔다.

 이 일곱 쌍의 면상에 눈, 코, 입들을 만들어 붙어 넣어야 한다.

내 손아귀에는 땡전 한 푼 없다. 적당한 재료가 없을까? 하여

 아침 일터로 오는 길에 온천장(溫泉場) 시장상가를 지나며 물색하니,

 어느 가게 문전에 쓰레기가 쌓여져 있는 가운데 이용할 만한 부스러기가 눈에 띄었다.

 이남선(李南先 제18호 예능 보유자)선생의 협조를 얻어

그 쓰레기를 처분 해 주는 조건으로 그 부스러기들을 거두어 와서,

 눈과 코 그리고 입도 붙였다는 사실을 나와 김광파,

 이남선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왜 이렇게 구걸까지 해 가면서 일 해야만 했을까?


* 아내가 만들어 준 손 열개

목마르고 배고파도 김타업과 천재동은 즐겁기만 했다.

왠지 불만 불평 한마디 없이 일만 했다.

 국제시장(國際市場)에서 만들어 온 오방신장옷을 신장(神將)에게 입혀 보니,

옷소매 끝에 손을 달아 붙어 주어야만 전체의 균형이 잡힐 것 같아서

광목 다섯 마를 떠 달라고 했더니,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조건이 아니니 일꾼들이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세 끼를 먹여 가며, 또 품삯을 줘 가면서,

막 부리는 노동자에게나 던지는 돼먹지 않은 말투였다.

 나는 마지못해 우리 집 안사람의 협조를 얻을 수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실은 이 무렵 작업 현장 동래까지 보행으로 왕래하였다.

집사람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목 다섯 마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로 하였다.

 “전차, 버스 탈 돈 10원이 없어 그 먼 길을 걸어 다니는

처지이면서 광목 살 돈이 어디 있으며,

또 식사 해결도 못 하고 굶주려 가면서 봉사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당신 말고 또 있습니까?”하고 외면하는 집사람…….

저녁에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 와 보니

 신장(神將)의 모형에 메어 달 큼직큼직한 손 열 개가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옷소매 끝에 매 달려 조화롭게 흔들면서 노는

신장들의 모습이 눈물어린 내 눈앞에 훤하게 보였다.

 

* 초대형 북을 만들다

마지막 작업으로 김타업의 북과 내가 맡은 대형 탈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북통은 베니어합판을 휘어서 만들었고 가죽 대용으로 광목천을 힘껏 당겨 고정시켰다.

 채색을 한 뒤에 처다 보니 진짜 북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북 속에 고성능(高性能) 확성기(擴聲器)를 장착하여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하였다.

 이 북을 소달구지에 싣고 김타업이 군졸(窘拙) 복장에 말뚝이탈을 덮어쓰고

두들기도록 되어있다.

내가 만든 지름 50센티 크기의 대형 탈은 소머리에 씌울 계획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소가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달구지에

각목을 붙여 각목 끝이 소머리 1미터 전방거리 쯤에 오게 하여

 그곳에 탈을 고정시켜 먼 곳에서 보면 소가 탈을 쓴 것처럼 보이도록 장치하였다.

 

* 푸대접받았지만 즐거웠다

전립(戰笠)이라 함은 군용 철모다.

 이 전립만 해도 만드는 데는,

형틀에 휴지로 본을 잡아 천을 붙여 가면서 인두질하고,

 건조시켜서, 액세서리를 붙이는 등으로 수 백 벌을 혼자서 만든다.

전립 수에 맞춰 쾌자(快子)도 만들고,

기타 여러 가지 필수품을 만드는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던

 김타업은 그만 쓰러지고 만 것이다.

피로와 영양실조 때문이었다.

 싸구려 여인숙에서 잠자고 점심 없이 무보수로 일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협회는 정말 우리에게 참으로 너무 인색했다.

나는 내이거니와 타인을 일 시켜 놓고 말이다.

시작에서 마지막 날까지 차비 한 푼 받아 본 적이 없고,

 식사는 물론 냉수 한잔 대접은커녕 수고한다는 말 한 마디 하는 사람 없었다.

한(韓) 회장이 어쩌다 한번 돌아보고 가는 것 뿐,

 서면 전포2동 내 집에서 동래 읍내까지,

동래 읍내에서 서면 전포2동 내 집까지 보행으로 오가고 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그것도 수 십 일간 귀가(歸家) 길에는 몇 번이고 쉬었다,

가다, 쉬었다, 가다 하는데 일어서면 눈앞에 수많은 개똥벌레가 날았다.

하지만 왜 그렇게 재미가 있었는지…….

즐겁기만 했다. 와서 보아주는 사람 없고 외로워도…….

하루는 어떻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총무이사 격인

문치언(文致彦)씨가 나타난 것이다.

저쪽 뜰 입구에 들어서자 말자 큰소리로 외치는

 말인즉 “천재동 창병 걸렸나! X대가리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구나! ” 

 나는 그때 마침 사다리를 타고 신장상(神將像)에 채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 바지에 페인트 빨간색이 묻어 있는 것을 보고는 하는 소리다.

문씨는 나의 연배지만 평소 나와 친하게 대하고 있는 사이라

 경상도 풍속으로 반가운 사람을 대할 때

 ‘ 이 문둥아 …….’

  또는 ‘ ’이 지랄아 …….  등

 욕설로 친밀감을 가장 크게 표현하는 정의담(情義談)인데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현실 앞에는 최악의 욕설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때가 때인 만큼 ‘ 천재동이 큰 욕 보구나!’ 이렇게 한마디 만 해도 울었을까?

모르겠다 마는 너무 야박한 비인간적인 언행으로 들려 왔기에,

온 몸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과 숨이 멈추는 듯함을 느끼면서,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린 것이었다.

 

* 출동! 큰 북을 울리며

개항(開港)이래 처음일 가장행렬 군단이

1967년 3월 세 사람의 피와 땀으로 제작되어

 이제 막 천재동 지휘 하에 부산역에서 시청을 향하여,

우정(友情)출연한 청도(淸道) 어릿광대를 선두로 출발 했다.

태극기대(太極旗隊), 시기대(市旗隊), 군기대(軍旗隊), 대고대(大鼓隊),

 풍악대(風樂隊), 동래야류대(東萊野遊隊)의 깃발이 창공에 나부끼고,

그리고 거구의 오방신장,

인간 모습의 이정표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장승출동대(長承出動隊)가 나아간다.

귀면(鬼面)을 쓴 소가 끄는 소달구지에는 대고(大鼓)를 울려 대는

풍악의 풍운아(風雲兒) 김타업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보인다!

행렬 앞뒤를 오 가며 사태를 감시하고

 이상이 일어나면 총지휘자에게 통고하는 갑옷 차림의 말을 탄 당마(唐馬)!

시작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기를 기대했지만

 나의 계산 부족으로 인하여 장승에서부터 문제점이 발생되었는데,

 길놀이 진행 중에 바람이 조금만 강하다 싶으면 장승이 넘어진다는

 당마로부터 전달을 받았다.

달려가서 본 즉 몸통의 둘레가 좁아서

 바람에 흔들리게 될 때면 장승 속에서 메고 있는 사람이

 다리를 뻗을 공간이 좁아서 몸의 중심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이것뿐이랴 귀 막히는 다른 사연은

행렬이 시(市) 청사(廳舍) 가까이 닿았을 때

 모든 풍악을 크게 울리고

 한바탕 신나게 놀이하는 태세를 갖추게 하는 신호를 하기 위해

 선두를 향하여 바삐 가는데

중앙동(中央洞) 전매청 골목에서

불쑥 나타난 사람이 나를 불러 세우고

“천선생! 이게 왠일이요? ” 놀란 표정을 지우더니

 바바리코트를 벗어 나에게 던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이거 맡아요!” 해 놓고

 행렬 속으로 뛰어 들 태세를 취하기에

나는 그 옷을 도로 그의 얼굴에 냅다 던져 버렸다.

 이 사람이 바로 당시 본 협회의 부회장이였던

 사진작가 K 씨 그 사람이었다.

부회장의 위치에 있으면서 거시적(巨市的)인 이번 행사를 모르고(?) 있었다는 듯이,

그러한 행위로 가장하는 이 사실은 제작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인색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기 모순적 행위였을 것이다.

다시 놀랄만한 사고는

시 청사와는 불과 100미터쯤 거리에 당도했을 때,

 나는 약속한 신호를 보냈다.

신호에 응해 모든 풍악이 일제히 콰~ㅇ 하고 악기 소리를 크게 울렸다.

 순간 갑자기 큰 소리에 놀란 것은 당마의 말이

 히히~잉 소리와 함께 앞다리를 높게 들고 뻣뻣이 서 버리는 바람에

 말을 탄 갑옷 차림의 장수가 그만 낙마하고 만 것이다.

당마(唐馬) 역을 맡은 장수는 기마경찰관이었는데

협조 요청을 하였을 때 흔쾌히 받아주신 분이었다.

행사에 누(累?)를 끼쳤다고 생각하였을까?

그 속뜻은 알 수 없지만 오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중앙동(中央洞) 골목 안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