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1. 아동극단 창단

무극인 2008. 2. 19. 13:17
 

21. 아동극단 창단

 

* 잘못된 만남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가

아동극단【갈매기】를 내가 중심이 되어 창단하고

내 작품으로 첫 발표를 갖기로 계획되었을 때이다.

그런데 당시 부산 부암국교(富岩國校)에 근무하는 L 교사가

수차에 걸쳐 나를 찾아 왔는데,

이유는 아동극단을 설립하고 싶은데 선생의 힘을 빌려야겠다는 것이었다.

 L 교사는 내 몰래 시청 문화계, 당시 부산 문화계를

 손아귀에 쥐고 좌지우지하던 O 계장을 통해

부산의 명사 한 분을 선정해서 단장으로 내세울 것을 지원 요청했더니

 장지완(張志完)씨를 지명하고,

 L 교사 자신은 대표격으로 한다는 것이

 부산 시청 문화계 탁상에서 이루어 진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자기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L 교사는 암암리에 서울서 공연된 주평 작품

『파랑새의 꿈』대본과 대소 도구 일체는 물론

의상까지 빌려 온 그의 재주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입담 좋은 L 교사의 구술(口述)에 나는 넘어가고

 처음으로 알게 된 O 계장, 장지완 두 사람 앞에서는 내 기(氣) 도 꺾여지고 말았다.

 연제는『파랑새의 꿈』으로 결정하고,

단원 모집 장소는 부산 남일(南一)국민학교로 정하였으며,

대청동 어느 사무실을 빌려 연습하기로 만반의 준비는 다 갖추어졌단다.

 이 어려운 일들을 L 교사 혼자서 치러 냈다는 것에는 박수를 보냈다.

이만하면 연습도 원만히 진행되리라고 믿고 있다가

 며칠 후에 연습장에 나가 보았더니,

앞에 나서서 지도한다는 사람이,

연극에 대해 그렇게 떠벌리며 집념을 보이던 그 사람들이

연극 연 자(字), 연출 연 자도 모르는 무지 그 자체였다.

 나는 칠판에 그림을 그려 가면서

 연극에 대한 기본 지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윤독(輪讀)부터 시작했다.

 며칠 만에 무대연습에 들어갔다.

하루는 교무(校務)관계로 늦게 연습장에 도착하였더니

 L 교사가 연습시키고 있었는데 여태까지의 연습을

뒤죽박죽 흔들어 놓고 전후 상하를 몰라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홧김에 잔소리를 좀 했더니 L 교사의 태도와 변명이 가관이었다.

“흥흥흥 그만 잊어버리고 그만….” 이라 중얼거렸다.

 발표 공연은 광복동 소재 미화당(美花堂) 강당에서 막을 올렸다.

그런데 여기에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공연장 입구에 나이 많은 L 교사의 어머니가 지켜 서서 출입을 감시하고,

매표소에 나가 보니 L 교사의 처되는 여인이

 입장표를 팔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놀라서

탁상 위에 표들을 감추노라고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또한 흩어져 있는 선전지를 주워 보았는데 이것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2차 공연은 내 작품을 하는 것으로 약속하고,

 이『파랑새의 꿈』을 공연키로 내가 양보한 것인데,

 감추려다 발각된 그 선전지에는, 이주홍(李周洪)작,

 L 교사 연출『피리 부는 소년』을 제2차 공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날의 1차 공연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공연에 대한 강평과 반성을 위해 간 곳은

 조그마한 밀주(密酒)집 사구려 안주에

냄새가 풍기는 아주 좁은 3층 방,

나는 대충 이런 말을 했다.

 

 

 “제2회 공연『피리 부는 소년』은 누가 결정했으며

우리의 본래 목적은 아동극 운동 이였지

 영리를 목적으로 아동극단을 창단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영리를 목적으로 이끌어 가려는 것은

 아동들에게 범하는 죄악이다!” 면서

 L 교사의 뺨을 연달아 두 차례나 쳤더니

“형님! 형님! 그것이 아니라…….”

하기에 내가 왜 너의 형이냐!해 놓고

단장인 장지완을 향해

 “ L 교사는 날 속여먹었다. 자네 잘 들어라 자네도

 언제인가는 내가 속았듯이 자네도 속을 것이니,

나도 천재동 처럼 속고 말았다! 는

얘기가 자네 입에서 나오기 전에는

 자네 존재를 무시 할 것이네”

 그들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자리를 떴다.

 

*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다

 

 그들과의 인연을 끝내고,

진정 “이것이 아동극 운동이다!” 라는 정신을 보여주는 뜻에서

1964년 3월에 아동극단(兒童劇團)【바다】를 창단 하였는데,

【바다】라고 단명(團名)을 붙인 이유는

 갈매기의 생활 터전이 바다인 까닭이었다.

서면(西面) 일대의 아동들을 모집하여

서면에 있는『어린이 집』원장의 도움으로 연습에 들어갔다.

 곧바로 과거 1941년도 국민극연구소 연구생 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유치진(柳致鎭)선생을 찾아 상경(上京)하였다.

선생을 만나 선생의 원작품(原作品)『까치의 죽음』을

아동극으로 승화해 보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작가(作家)로부터 쾌히 승낙을 받아 낸 것은 물론

조언까지도 얻어 내어 하부(下釜)하여 공연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서면 전포동 성모병원(聖母病院) 건너편

기독교 방송국옆 이성극장(二星劇場)에서 막을 올렸는데,

그날 시내 모 처에서는【갈매기】가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에 막을 올린 것이다.

나는 이성극장 비상문까지 모두 활짝 열어 놓고 무료 입장시켰다.

 아동은 물론 남녀노소, 인산인해 장사진을 이루면서

 인파가 떠밀리는 바람에 극장 옆 전포천(田浦川)에

 사람이 떨어져 부상자까지 생긴 것이었다.

막을 올릴 무렵, ‘갈매기’ 측 관계자가

우리 ‘바다’ 측 사태를 살피려고 온 것이다.

 

“여기는 무사하냐?”

갈매기 쪽은 당국으로부터 방금 공연 정지 처분을 당해서,

 이 쪽 사정을 알아보려 급히 왔다는 것이다.

나는

 “ 아동극은 아동을 상대로,

그들의 꿈을 키워 주기 위한 것이지,

 미숙한 실력으로 영리 행각을 하고 있으니

 당국에서 가만히 두고 보겠느냐? ㄴㄴㄴㄴㄴ”

 고 충고 삼아 한마디 하였다.

 

그 후 어느 날 KBS방송국이 서울 남산에 있을 때

 방송국에서 우연히 L 교사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는 기어코 차 한 잔을 사겠다 하여,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머리를 숙이며 

 “과거 시근이 없어 선생님 많이 괴롭혔습니다.” 하는 것이다. 

 “지금 어떻게 지내느냐?” 물어보았더니,

방송국 어린이 프로에 일을 좀 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당시에 교사의 선배요 연극계의 선배로서

설득력 있게 L 교사를 포용하지 못한 점이

아쉬운 점으로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