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3. 제1회 천재동 단독 『시민위안민속놀이잔치』

무극인 2008. 4. 2. 22:10
 

*제1회 천재동 단독 『시민위안민속놀이잔치』

1968년 당시 부산 민속예술보존협회에 나가랴, 학교에 출근하랴,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개인적으로 민속적 연극 소재(素材)를 구상하고 있던 중에

어릴 적에 떠돌이 객(客)으로부터 들었던 도가적(道家的)

 이야기 한편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쓴

 대본이 아동극 가면(假面) 무언(無言) 무극(舞劇)『신술선인(神術仙人)』이었다.

이 단막(單幕) 물(物)을 가지고, 근무 학교 토성교(土城校)

나의 학급 1학년 아동들을 지도하여 공연을 목표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마침 한형석(먼구름 韓亨錫: 당시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동래야류(東萊野遊) 18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악사진(樂士陣)을 동원할 수 있었고,

 우리 풍악 굿거리장단을 효과음으로 하여 아동들의 열연(熱演)을

 관람한 관중들이 하나같이 탄성(歎聲)을 자아내는 이채로운 공연이었다.

서면 로터리 부근 제일은행(第一銀行) 직영 예식장에서

무료(無料) 공개 공연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제1회 천재동 단독(單獨)《시민위안민속(市民慰安民俗)놀이잔치》가 된 것이다. 

 

*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釜山民俗藝術保存協會) 구성(構成)

부산 민속예술보존협회 명예회장 곽상훈(郭尙勳), 이사장 김하득(金夏得)

두 선생을 내가 아직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고

협회의 모든 일들은 한원석(韓元錫) 선생이 앞장서서 운영에 임하고 있었다.

한(韓) 선생은 협회 이사(理事)의 한 사람이지만

 정해진 호칭(呼稱)이 없어「한 회장」으로 부르며 존경했다.

회관도 사무실도 없는 시절이라 모이면 주로 한회장의 주관으로

한회장의 자택에서 회의도 하고 연습도 하였다.

내가 동래야류와 인연을 맺고 1년 후인 1966년 5월 1일

동래 기영회(耆英會)에서『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로

단체 명(名)을 개명(改名)하여 재결성한 당시의 구성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명예회장: 곽상훈(郭尙勳)    회장: 김하득(金夏得)    부회장: 김재문(金在文)

총무: 윤태윤(尹兌允)    재무: 문철환(文喆煥)      감사: 박기득(朴基得)

임원: 이장명(李璋明), 신우언(辛佑彦), 한원석(韓元錫), 오점룡(吳点龍)

      서국영(徐國英), 권달천(權達天), 김혜성(金慧星), 이영도(李永道)

      우신출(禹新出), 서택진(徐澤辰), 한남석(韓南錫), 천재동(千在東)

      문박하(朴文夏), 조일호(趙日浩), 이백순(李伯淳), 김용기(金龍基)

모두가 생소한 사람들이다.

 초년생이라 하루라도 빨리 분위기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이런 와중에 아동들을 이끌고 상경하여《한국아동극연합회》가 주최한

『아동극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문공부장관상(文公部長官賞)을 수상하여

 관계자들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인사들로부터 축하와 찬사를 받았으며

 이 해에 제3회 천재동 작품전을 부산시 시공보관에서 개최하기도 했던 분주한 한해였다.


*풍어제를 준비하면서

부산시 주최로 매년 송도(松島) 해수욕장에서 베풀었던

 풍어제(豊漁祭)를 미포리(尾浦里) 앞 바다로 장소를 옮겨서

 베풀어지게 되었을 어느 해에 시청 담당 부서의 협조 요청이 있었다.

선체(船體)모형과 선체 크기의 도면(圖面)를 건너 주면서

이 선체에 걸맞은 대형(大型) 용선(龍船)을 제작해 달라는 것이었다.

도면을 훑어 본 결과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잔일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여

서독(西獨) 대통령 방부(訪釜) 행사 때 초상화를 그린

간판화가로 평소에 알고 있던 젊은이에게 도움을 청하여 협조 받기로 했다.

작업하는 동안 젊은이는 자비(自費)로 빵과 우유로 점심을 때워 가면서 일했다.

작업이 끝나는 날 한(韓)회장에게 그냥 보낼 수 있겠느냐며

 간신히 진언(眞言) 했더니 일금 15만원을 주는 것이었다.

 즉석에서 간판화가 본인에게 10만원을, 데리고 온 제자에게는 5만원을 건너 주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다가 그만 간판화가가

갑자기 울어 버리는 것이었다.

내 손을 잡더니 “선생님! 나는 괜찮습니다.

 선생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작업을 하는 동안 분위기를 나는 파악해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보고 생각한 그대로군요.

선생님의 봉사정신에 감동하기보다는 푸대접받으시고 있는데서

 선생님에 대한 눈물이 저절로 나오는군요.”

 나도 상대의 손을 꼭 잡으며 같이 울고 만 것이다.


*스승의 교훈을 되새겨

전두환 정권 시절에 전개 된 ‘국풍(國風)’ 행사 때로 기억되는데

 북으로서는 춘천시,

서로서는 인천시,

남으로서는 광주시,

 동으로서는 부산시,

 중앙은 물론 서울이다.

이 다섯 도시의 민속놀이 패가 서울에서 길놀이를 하게 되어있었다.

부산시 대표로『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가 참여하게 되어

당일 서울로 출발하는 날 아침 금정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집합하여

 한번 예행연습을 하게 되어,

연습을 하는 도중 출연자 일행을 인솔할 책임 있는 시청 직원들이 나타났다.

 나타나자마자 갑자기

“그만해라! 박자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뭘 하는 거고!” 하는 것이다.

 관청 담당자 앞에 자기 권위를 세우려

야비하게 연출 책임자를 무능한 사람으로 내 모는

 경솔한 그 사람은 방금 예행연습 중이던 출연자 중의 한 사람인 M 씨이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동래 토박이의 한 사람이다.

무능한 자로 낙인찍힌 천재동의 소개를 M 씨 당신에게 조금만 하겠소!

천재동은 과거 연극 공부 할 때 민속무와 한국무

그리고 우리 풍물과 당악(唐樂), 발레, 음(音)․성악을 공부한 사람이다.

 민속무를 한국무로 개발 한 조택원(趙澤元), 최승희(崔承姬), 배구자(裵龜子) 같은

분들의 활약상 및 실기를 공부하였고

음악은 이왕가(李王家) 음악관리 담당자 이종태(李鍾泰) 선생의

국악(國樂) 및 당악(唐樂), 백결(百結) 선생의 굿거리장단

 내력 등등을 교육받아서

 현재『동래야류』『동래학춤』『동래지신밟기』보존회(保存會)가 보유하고 있는,

이 세 종류의 연출을 담당하고 있는 자를 모욕한 것인데,

모욕당한 당사자인 나는 너무 억울해서 남 몰래 울었던 것이다.

성악가 임상희(任祥姬)의 피아노 연주에 맞추어『니나의 죽음』을

연구생 앞에서 시범으로 불렀던 경험이 있는 사람보고

 박자도 모르는 운운은 너무 지나치지 않소? 

 날보고 욕하지 마시오!

40여 년간 이런 연유로 꼭 세 번 울었습니다.

나는 연극 연구소에 입소할 때 “고구마 껍질을 먹으며 무대에서 죽어라!”며

내 손을 잡고 지도 해 주신 옛 선생님들의 교훈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한마디 불만 없이 춥고 배고프고 목말랐지만,

그 어려웠던 일들을 묵묵히 재미있는 기분으로 견뎌 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고구마 껍질을 먹을 겁니다.


*길놀이의 전문가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 일생을 바치려고 가입해서

일년 만에 ‘길놀이’ 를 연출한 체험이 모체가 되어

그 후 광복동(光復洞) 거리를 두 차례나 거리굿으로 열광시킬 수 있었고

《목포개항80주년기념(木浦開港周年紀念)》축제 행사에

준비관계로 초청되어 길놀이를 연출 한 일,

동래야류 길놀이 발굴,

송상현 동래 부사 군사 행렬 채록 및 도해화(圖解畵) 완성,

 2000년 동래 충렬제(忠烈祭) 길놀이를 계속 맡아

장비 제작 및 총지휘한 나의 행적은 가히 기록적이라고 자부심을 가져 본다.

현재 ‘동래야류 길놀이 행렬 순도’는『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소장하고 있고

 ‘동래부사 송상현 군사 행렬도’는 『동래구청(東萊區廳)』에서 소장하고 있다.


*말뚝이의 고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해마다 서울에서 만 개최하던 것을,

다음부터는 그 해 우승한 팀의 고장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방침이 바뀌어

영광스럽게도 1967년 제8회 전국대회가 처음으로,

지방인 부산 구덕공설운동장(九德公設運動場)에서 성대히 막을 올리게 되었다.

대회당일 전국 각처의 참가 단체는 부산역 광장에서 출발한 길놀이 대열과 함께

대청동(大廳洞)을 지나 대신동(大新洞) 구덕공설운동장(九德公設運動場)으로 쉬지 않고 행진하여

대회장인 운동장에 들어서면 한참 동안 장기(長技)들을

자랑하며 자유롭게 놀도록 되어 있었는데,

 대회장에 도착한 동래야류도 계획에 따라

타 팀에 뒤질세라 장기를 마음껏 발휘하며 놀이를 하였다.

말뚝이가 대열에서 벗어나 자꾸 이탈하기에

 나는 그 때 마다 대열 속으로 밀어 넣곤 하였다.

 사실은 행진 할 때부터 노구(老軀)를 염려해서

 신변을 내내 지켜보고 온 것인데,

 결국 대회장에 와서야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장기 자랑이 끝날 무렵 본부석에서 방송을 통해

 “동래야류 말뚝이는 본부 앞까지 오셔 주시오 죄송합니다!” 하기에

 그때 탈을 벗겨 보니 온통 얼굴이 땀으로 얼룩져 있고

 눈코를 뜰 수가 없어서 대열에서 자꾸만 이탈해졌다 하셨다.

 나는 탈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오른 팔로

 박덕업옹(朴德業翁)을 부축하여 본부 앞으로 나아갔더니

 본부석에서는 모두 기립하여 박수갈채로 맞이하였고 그 연기력을 극찬하였다.

되돌아오면서 박옹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 탈은 잘 보이지도 않고, 무겁고, 공기가 통하지 않아 이렇게 땀이 난다.

옛날 탈을 쓰고 한 번쯤 춰 봤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때 ‘옛날 탈!”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책임감을 느꼈는데,

이 후로 동분서주하면서 고증받고 힘겹게 자료를 찾아 헤맨 끝

 말뚝이 탈을 복원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본『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현재 그 문제의 탈을 고수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스꽝스럽게도 ‘1965년 제8회 전국대회에서 우승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을 때 쓴 탈이다 ’는 것이 그 이유이다.

탈에 대하여는 이 천재동이 책임자가 아닌가?

여기서도 나를 철저히 배제하려는

동래 토박이가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지금껏 고집하고 있다.


*또 다른 만남

1971년도《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전주시(全州市)에서 개최되는 해다.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는 올해 처음으로

〔동래지신 밟기〕를 참여키로 이사회에서 결정을 보았다.

서울에 출장 다녀온 한회장이 이사회 석상에서

 서울 민속학자 최상수(崔常壽)씨를 찾아〔동래지신 밟기〕를

 전국대회에 내 놓기로 결정했으니 협조 바란다고 하였더니

최학자는 찬동하고 2〜3일 뒤에 하부할 테니

 지신밟기 연희본을 준비 해 놓기를 원하고 있으니 S교수가 준비하시오! 했다.

 S씨는 부산에서 유일한 민속놀이 전문위원이다.

그래서 〔동래야류〕연출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S씨는 바쁘다는 핑계로 피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천 선생이 써 주어야겠다.”로

한(韓) 회장은 나를 지명하였다.

 내가 볼 때 영남형 지신밟기 형태는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대동소이 하지만 풀이 곡조에 있어서 다소 다를 뿐이다.

놀이 형식이나 풀이 곡조가 울산지방(蔚山地方)과 꼭 같다.

어릴 때부터 많이 보아 온 탓으로 내가 쓰겠노라고 승낙했다.

 이어서 한 회장은

 “S교수는 전문위원이요, 그리고 대학교수인 때문에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위신이 있으니까 연출을 맡아 주시고,

천 선생은 그 보조로서 욕봐 주시오” 하였다.

나는 당장 노트와 호주머니용 스케치북 그리고 5색 사인펜을 사 가지고

노트에는 연희본을 쓰고 스케치북에는 색깔을 구분해서

이동하는 대열의 변화 사항을 도표로 그려서 즉각 제출하였는데

 그것이〔동래지신 밟기〕원형으로 결정되어

 오늘의〔동래 지신밟기〕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동래 지신밟기〕연희본이 결정된 후부터 있었던

 S씨와의 인간관계를 나는 왜 글로 쓰고 싶을까?

연습 장소를 민락동(民樂洞) 어느 뒷산 묘가 있는 잔디밭으로 정하고

 매일 같이 연습에 들어갔다.

 나는 수정, 보완에 도움이 될까 봐 싸구려 카메라로

요긴한 장면 장면을 가끔 촬영했다.

그랬더니 S씨 선생은 갑자기 화를 불쑥 내며 한다는 말이

 “누구는 카메라가 없어서 안 찍는 줄 아나!!”하는 것이다.

연습현장에 오랜만에 민속학자요 이사인 J교수가 왔다.

 J교수와 나는 오래간만이라 인사와 그 간의 일들을

 이야기하노라고 반성회 석상에 늦게 들어섰더니

 J씨가 하는 말이

“둘이서 무슨 내 욕을 했나?” 한다.

 J교수는 “아이고 또 …….” 라고 했는데,

말 가운데 「또」자를 붙인 것은

후배인 J교수를 가끔 괴롭힌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이튿날 S씨는 큼직한 고급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연습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촬영하는 장면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