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4. 창작가면(假面) 최초 서울전

무극인 2008. 4. 21. 21:20
 

* 창작가면(假面) 최초 서울전

어느 날 개인전을 준비하느라 작품 제작에 몰두하고 있던 중인데

마침 문화재 관리국 관계자가 찾아와

내 작품을 보고는 충분히 작품성과 재능이 인정되니

기능보유자로 신청하라는 독려와 아울러 여기 이 작품들을

문화재 관리국 주최로 서울 전시를 하면 좋겠다고 제의(提議)하였다.

나는 생각 끝에 그 제의에 공감하고 결정을 보았던 것이다.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 입회한지

6년만인 1971년 문공부문화재관리청(文公部文化財管理廳) 주최

 한국가면극연구회(韓國假面劇硏究會) 주관으로

《천재동 창작가면 특별전》이 서울 코스모스 백화점 전시관에서 성대히 열렸다.

당시 고(故) 양세주(梁笹珠, 무형문화재 제18호동래야류예능보유, 꽹가리)는

모든 경비는 자기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서울 전시 준비를 자기 집에서 할 것과,

 탈 제작 방법을 습득하도록 해줄 것,

 자기 작품 몇 점을 찬조출품 형식으로

참여시켜 줄 것을 제안하였는데

 나는 그의 의사를 받아들여 몇 점을 찬조 출품시켰다.

〈참고: 천재동 창작 전시회에 동래야류 탈은 출품하지 않았음〉

그리고 그 해『부산경남향토문화사업회』가 주는

 제1회 향토문화상을 받았고

연달아 중요무형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제18호동래야류기능보유 인정서(認定書)』도 받았다.

 


◎ 영원한 숙제?

〔동래지신밟기〕는 1977년도에

부산 지방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동래지신밟기를 좀더 짜임새 있게 공연을 하려면

무엇보담 효과적인 장치인 것인데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중들의 시각을 염두에 두고 처음으로 장치를 하여보았는데,

6척 길이의 각목으로 집 뼈대를 세워 벽과 지붕을 마분지로 붙이는 등으로 장치를 하였다.

 하지만 넓은 운동장에서 실제 연희를 하였을 때

연희 장면이 벽에 가려 관중들이 효과적으로 감상하기는 불가능하였다.

 다음 해에는 12척 길이에 3촌 각목으로 제법 큼직한 기둥을 세워

필요 한 곳에만 벽을 만들고 실행했지만 흡족할만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다음해에는 골격 기둥에 큰방, 대청, 부엌 등으로

글을 써 붙이고 했지만 기대했던 좋은 성적을 얻기에는 역시 역부족이었다.

1978년 강원도(江原道) 춘천시(春川市)에서 대회를 맞이했는데

 이번에는 큼직한 팻말에 장소 표시를 붓으로 써서,

 그것을 땅에 말뚝으로 박아놓고 연희한 것도

좋은 성적은커녕 별 효과 없이

 전국대회에 마지막 출전이 되고 만 것인데,

이렇게 네 번 씩 이나 바꾸어도

효과적인 장치가 되지못하여

 지금도 정말 나를 괴롭히는 숙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