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연희본 정립
1965년도부터 줄곧 동래야류 연희를 눈여겨보아 왔다.
연희자나 악사들이 놀이에 능숙하였고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는 등 실력의 우수성이 인정되었기에
전국대회에서 당당히 우승한 것이다.
더더욱 탈을 쓰고 춤추는 연희자나
악기를 메고 신나게 사물을 울려 대는 사람이나
모두가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어서 노련한 면이 보기에도 훌륭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가만히 보고 지나쳐 버릴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관찰하여 보니,
어제 놀이와 오늘 놀이가 다르고,
아침의 놀이가 저녁에 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왜? 무엇 때문일까? 생각 해 본 결과로서
극의 흐름의 과정을 약속하는데 근본이 되는 연희본인데
연희본 없이 주먹구구씩으로 적당히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기 때문인 것이 원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연희본을 시급히 작성하고 이를 정립해야 된다고 생각되어
연희본 만들기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연희본은 기본 틀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재미있고 극적이게 조작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놀이는 본래에 끼리끼리 모여서 끼리끼리 즐겨 놀았기 때문에
연희하는 당사자들은 신풀이로 재미있지만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면
놀이가 당연히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놀이에는 기본이있고 그 기본 틀을 바탕으로
연희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주어야
피연희자들이 개념파악을 쉽게 하지 않을까?
과거 1930년대의 놀이는 어떠했을까? 등등 고심 끝에
나는 먼저 놀이 원형을 찾는데 심혈을 쏟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동래야류〕의 연출은 S씨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는 공개하지 않은 자기 혼자만이 사용하고 있는
연희본 같은 대본을 같은 것을 나는 우연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통영오광대〕를 모방한 감이 없지 않았다.
이러다가는〔야류〕가〔오광대〕로 흘러갈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진규(盧振奎, 영감役보유자) 선생이
“동래야류는 이런 것이 아니다…….”하며
몇 번이고 부당하여 화를 내는 것을 본 일도 있고 하여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끼니때도 잊은 채
많은 고로(古老)들을 찾아다니면서 채록하였다.
박덕업옹(朴德業翁)은 16세 때부터 야류에 가담했다면서
춤사위에 관해 이야기를 주로 많이 하셨다.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선생이 쓴 채록본(採錄本)과
최상수(崔尙壽) 선생이 쓴 채록본을 몇 번이고 통독하고
비교 검토한 결과 석하 선생 채록본은
제2양반과장(兩班科場)이 중점적으로 기술되어 있어서
그 부분에 크게 참고가 되도록 되어 있고,
최상수 선생 경우는 연희본 형식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고로(古老)들 얘기와 현 연희자 몇몇의 이야기와는
다른 점이 몇 군데 있었지마는 참고할 점이 많아
최상수 선생이 채록한 연희본을 토대로 하고
신우언(辛佑彦: 연예보유 넷째 양반 역)옹을 스승으로 모시고
〔동래야류〕연희본 정립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신우언 선생은 젊을 때부터
동래야류패의 총무 업무를 맡으면서 동참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이야기 하였다.
65년 전국대회 출전 시에 동래야류에 대하여 직접 고증하신 분이며,
인솔자 자격으로 앞장 선 분이다.
나는 시간을 내어서 틈틈이 선생을 찾아뵈었으며,
그때마다 선생도 싫어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뜻으로 반갑게 대해 주셨고
아는 바를 소상히 말씀해 주셨다.
선생과 내가 만나는 장소는
동래기영회관(관리로 퇴진한 모임 회관, 300년의 역사를 가짐)
건물을 지키는 사람이 거주하는 집(회관 입구 왼편에 있음)인데,
방 한 칸을 선생의 개인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창고는 그의 부인이 ‘동래옥(東萊屋)’이란 상호로
동래의 명물인 전통 파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아담한 주점을 경영하면서 주류나 건어물 등의
물자를 소장해 두는 창고 역할을 하는 방이었다.
어두컴컴한 이 방에 10촉 점등을 켜 놓고
예측할 수 없는 긴 시간을 두고 나의 역사는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문어 다리를 빚어 안주로 하고, 술 한 잔 따라 마셔 가면서,
최상수 채록본을 펴 놓고,
여기는 이러했고, 저기는 저러했고,
이것은 과장이다, 저것은 조작이다 등,
평소에 내가 고로(古老)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옳다, 그르다는 것들을 신우언 옹의 고증에 따라 채록하고
또 정리하고 하여 결과적으로 정립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놀이하고 있는 연희본 그것이다.
연희본 정립에 착수한지 7년이 지난
1972년도에 완성을 보았지만
이사진(理事陣)의 감정(鑑定)을 통과해야 되는 마지막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우언 옹으로부터 체험담을 채록하는 가운데
연희본 만큼이나 귀중한 보옥(寶玉)들을 거머쥐게 된 것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동래야류 길놀이〕의 윤곽(輪廓)이 내 머릿속에 잡히면서
「 앞놀이, 뒷놀이」의 구성과 순열(順列)을 충분히 도해화(圖解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동래야류 연희본〕과 〔동래야류 길놀이〕에 대한
진부(眞否)를 가리기 위해 이사회(理事會)가
철도호텔에서 사흘간에 걸쳐 감정한 결과
전원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동래야류 길놀이〕순열도(順列圖)는 감정 통과 후에 그려낸 것이다.
7년간의 세월동안에 있었던 사세한 이야기를 글로 다 표현하랴?
더불어 이사회에서 앞으로의 연출은
신우언 옹이 담당해야 한다고 결정하였으나
“나는 이미 늙었어, 천재동을 내 대신 연출자로 추천하겠다”며
극구(極口) 사양하여 결국 내가〔야류〕〔학춤〕〔지신밟기〕
즉 협회가 보존하고 있는 자랑거리인 3종목의 연출을 담당하기 시작하여
30년간을 책임지고 맡게 된 계기(契機)인 것이다.
* 부산시립민속예술관 관장에 취임
1971년 4월 한국에선 최초로
민속예술 전수관 건립의 기공식이
동래구(東萊區) 온천동(溫泉洞) 산 13, 금강공원(金剛公園)에서 거행되었다.
3년만인 1974년 5월에 약 60석 규모의 실내 공연장과
전시장을 갖춘 한옥 2층 건물에 『부산시립민속예술관』이란 이름으로
간판을 붙이고 성대히 개관식을 하면서
초대 관장으로 임명된 천재동이 별정직 을(乙) 2급으로
즉석에서 박영수(朴英秀)시장으로부터 직접 사령장을 받았다.
한원석, 신우언 양 옹께서는 자기 일같이 기뻐하여 주었지만
인사들 가운데는 동래 출신이 아닌
엉뚱한 사람을 관장으로 임명했다는 점과
「동래민속보존협회」자(字)가 든 간판이 아닌 데에 대해서
비난과 불평을 노골적으로 털어놓는 자들도 많았다.
어떤 이는 나에게 와서 직접 불만과 불신의 눈치를 던지기도 하였고
40년이 지난 오늘 날 까지도 내가 힘겹게 이루어 놓은 업적에 대하여
왜곡(歪曲)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실은 당시 부산시 입장에서 볼 때
민간단체로서는 경영에 어려움이 있을 테니,
민간단체인『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가 자력으로 운영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먼저 시에서『부산시립민속예술관』이름으로 운영키로 방침을 세운 것이다.
나도 누구 못지않게 민속예술에 열정을 가진,
본 협회 임원이요, 문화재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부임 해온 시청 행정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 행정 사무실은 2층으로 옮기고,
본 사무실을 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도록 배려하였다.
이제부터 나는 시(市)의 녹을 먹은 공무원 한 사람이 되었고,
교육 공무원 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걸림돌 없이 하게 되어서 마음이 더없이 한층 홀가분하였다.
먼저 전속 무용단, 창극단, 민속놀이, 풍물놀이 등을 창단하여,
당시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던 이동안(李東安 제79호 발탈예능보유)선생을
지도자로 모셔 와서, 단원들을 교육하여
매주 토~일요일마다 공연하였는데,
실비로 관람객을 유치하면서
시민들의 민속예술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속 출연 단체는 주로 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민속반(啓星女子商業高等學校民俗班) 학생들이고,
창극단은 김동표(金東表 제45호기능보유)일행이었다.
이색적인 공연은 학생들의『오방신장기(五方神將旗) 놀이』,
김동표 일행의『춘향전(春香傳)』, 공연에서 수입된 금액은 꼭꼭 시청에 납부했더니,
시에서는 이런 소액은 관의 경비로 사용하라는 것을 사양하였다.
담당 직원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시민회관 관람료 보다 수입이 많다고 하였다.
또한『민속백일장』과『부녀자그네뛰기대회』도 연중행사로 개최하였다.
월급과 작품 판돈으로 제반 경비에 사용하고
한 푼도 부산시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이 대외적인 행사를 몇 사람의 직원과 관장의 힘만 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워서
주최는『부산시립민속예술관』이 하고 주관을『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가 맡아서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협회의 협조가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1976년 5월 달을 기해 협회 전수관으로 바뀌면서
민속경연대회와 민속백일장 등 모든 연중행사가 협회 행사로 고스란히 인계하였는데
그 중 그네뛰기는 7회에서 중단되었고
민속백일장은 전국대회로까지 발전하여
오늘 날에는 대상(大賞)에 대통령상을 수여하기 까지 되었다.
『부산시립민속예술관』이 개관하던 날은
신임 초대 관장 천재동 취임과 함께
예술관 앞 송림(松林) 숲 일대에서 환갑연(還甲宴)도 겸하였는데,
예술계를 비롯하여 많은 하객들로부터 축복과 함께 기념품도 많이 받았는데
박영수 시장으로 부터 직접받은 탁상용 시계는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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