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학무(東萊鶴舞) 5인무(五人舞)를 만들다
1976년 5월을 기해『부산시립민속예술관』을
협회에 인계함과 동시에 나의 관장 직도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부녀자그네뛰기대회』도 9회로써 아쉽게 중단되고 말았지만
협회에서 이어받아《민속놀이경연대회》는
제32회(2001년 현재)로 현재까지 지속되어
대상에는 대통령상을 수여하는 등 크게 발전하고 있다.
1976년도《제17회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경남 진주시(晋州市)에서 개최되던 해에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는〔동래학춤〕을 가지고 참여하기로 결정을 보았는데
강호인(姜浩仁) 총무 이사가 날더러 군무(群舞)를 안무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동래학춤을 발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최종 보고한 사람이 S 씨 이니까(※참고: 발굴 당시 무보는 천재동이 학춤의 보유자인
김희영씨를 모델로 하여 직접 춤사위를 하나하나 보면서 그렸음),
S 씨에게 양해를 받아야 된다고 하였더니,
S 씨는 이미 협회를 등진 사람이니 무시하고 천선생이 꼭 일을 맡아야 한다고 하였다.
S 씨에게 정식으로 양보를 받아야만 동래학춤 군무에 관여할 수 있다면서 정중히 거절 하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S 씨로부터 양해를 받아 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즉시 군무(群舞) 구상에 들어갔는데
소재의 배경을 동래지방에 예로부터 전해지는 풍수학적 근거에 착안(着眼)을 하였다.
즉 동래(東萊)에는 예로부터 학(鶴)이 많이 서식했었고
또 학의 현상을 닮은 지형이 있어 지명 또한 정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잘은 모르겠으나 동래 사람은 팔만 들어도 춤이 된다고들 하며
그 춤이 학을 많이 닮았다 하여 학춤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다.
마안령(馬鞍領)을 학의 몸통이라 하고 동장대(東將台)는 왼쪽 날개,
서장대(西將台)는 오른쪽 날개라 한다.
학수대(鶴首台), 학소대(鶴巢台)가 있고, 학란암(鶴卵岩)도 있다.
그 중 동서남북, 중앙 다섯 군데의 지명(地名)을 오방설(五方說)과 관련지어
오인무(五人舞)란 이름으로 무대무(舞台舞)와 마당무 두 가지로 안무(按舞)하여 연출을 하였다.
* 제2회 천재동 단독 『시민위안민속잔치』
동래학춤 군무를 안무하여 연출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나는 단독으로 개최할《제2회 부산시민위안민속잔치》를 위해 구상하고 연습을 하였다.
내가 이끌고 있는 민속극단『한나라』를 주축으로 해서
부산전자고등학교(釜山電子高等學校), 계성여상(啓星女商) 등
당시 내가 지도하고 있던 각급 학교 민속반 학생 400여명을 동원하여
『웅박캥캥』이란 명제를 가지고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 전개하였다.
1부‥ 길놀이(광복동) / 2부‥ 자작 민속극 공연(시민회관) / 3분‥ 작품 전시회(광복동 로터리 전시장) 들이다.
광복동 길놀이를 전개(展開)하기 위해 부산경찰국을 찾아갔다.
제복 어깨에 견장을 요란스럽게 붙인 분에게 취지를 말하고,
한 시간 반쯤 차 없는 광복동 거리를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자신의 머리를 검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빙글빙글 돌리면서
“머리가 이레 된 사람 아니오?
광복동 거리에 자동차 통행을 차단해 버리면
남포동 일대의 차 소통이 어떻게 된다는 것 몰라서 그라요? 알고 그라요?”한다.
“그렇다면 좋소! 시장님에게 바로 가겠소.” 했더니
“시장님 잘아요?” 하기에
“내가 콩을 팥이라 해도 곧이 들어줄 사이요. 내가 여기를 먼저 들린 것은,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하는 것 보다
일선 책임자의 권위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게 된 것을 이해하시고 협조를 구하는 것입니다.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하였더니
“그러면 낮 12시부터 1시 30분까지만 이용하시오” 하면서 허락해 주었다.
승낙만 해주고 끝난 것이 아니라
고맙게도 광복동은 물론 남포동, 충무동, 대청동 까지 파출소 요원을 총동원하여
시민들의 안전 지도까지 해 주는가 하면
심지어 백차가 행렬의 앞장에서 안내는 물론 호위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앞서 시장 이야기가 나왔는데 당시 박영수(朴英秀) 시장은
부산광관 분야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일을 많이 한 사람이다.
금정산성(金井山城) 그리고 자성대(子城台) 등 옛 사적을 보완하였고,
부산관광의 기본 틀을 먼저 이룩할 목적으로
“온천장(溫泉場)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금정산성에 올라
성터를 구경하고 금성마을 민속촌에서 산성 막걸리를 마시고
다시 케이블카로 금강공원(金剛公園)에 내려
민속예술관에서 민속놀이 감상하고는 온천으로 목욕을 하면
피로가 확 풀리는 관광! 어떻습니까?” 라고
나에게 말해 준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시장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부산 민속예술에 대해 알 것은 알아야 된다는 생각에서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나는 시장실에 가서
민속에 대해 이모저모를 이야기하였던 것이다.
* 토우(土偶)에 눈을 돌리다
어린 날 경주 외가에 들리면
왜색(倭色)에 물든 방어진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을 갖기에 충분하였다.
계림(鷄林), 고분(古墳) 등 유물과 유적은 물론이고
대궐같이 큰 최부자댁의 기와 집, 모든 것들이 고색창연(古色蒼然)하여 신비로웠다.
물은 북으로 흐르고 모래는 남으로 흐른다는 강과 반월성(半月城,),
그곳 교동(校洞) 외가(外家) 일대(一帶)에는
흙으로 빚은 토우(土偶)가 굴러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었다.
외가에도 토우가 있었는데 문화재 차원에서 소중히 간직한 것이 아니라
주변에 그냥 굴러다니기 때문에 아이들이 가져다 놓아둔 것뿐이다.
어떤 가정에서는 아이가 주워 오면 귀신 시끄럽다 하여 내 버리는 것이 일수였다.
또래의 외가 집 아이들과 지천으로 깔린 황토로
여러 가지 기물을 만들어 소꿉장난 하면서 토우도 만들어 보았는데,
이렇게 만들기에 관심을 갖게 되어
오늘 날 토우를 정식으로 빚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아마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집 서사(書士)
김생원(金生員)을 보좌하던 허도령(許道令)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이 든다.
크지도 않고 조그마한 『신라토우(新羅土偶)』는 소박하고 투박한 것이,
그 시대의 생활상을 말해 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나는 어린 날을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에 살면서
보고 겪었던 우리들의 애환(哀歡)을 토우로 만들어
현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내가 아니면 누가 만들랴? 하는 심정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내가 만든 것 중에서 가면이나 그림보다도
토우에 매력을 많이 느끼는 편이다.
그런대 흙을 빚어 완성해 놓고 보면
무엇인가 부족한 데가 없나 하고 걱정이 된다.
그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나의 시대에 걸맞은 토우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만들 것인가?
평소 나의 토우에 관심을 보이던
박영수(朴英秀) 시장이 어느 날,
일금 10만 원짜리 수표를 내 손에 쥐어 주면서
여행도 하고 연구도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10만원이면 적지 않은 액수다. 참으로 고마웠다.
여행길에 올라 제일 먼저 간곳이 김해(金海) 수로왕릉(首露王陵)이었다.
능 양쪽에는 양(羊) 모양의 석조물과 돌기둥이 꽂혀 있다.
나는 둥근 돌기둥 인줄만 알고 곁에 가 보니
뒷면에서 볼 때는 돌기둥인데 앞에서 보아하니
섬세한 갑옷 차림의 장군 조각상이었다.
경주(慶州)에 들어서면서 먼저 괘릉(掛陵)을 찾아 가니
마침 자전거 여행자 일행이 그리로 간다기에
자전거 뒤를 밟아 괘릉 앞에 들어서니 상당히 큰 돌기둥이 서 있었다.
수로왕릉 돌기둥 조각과 같은 수법의 조각상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경주 시내에 들어서서 박물관을 찾아 실내를 일주하고
뒤뜰에 들어가니 수많은 석불들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웬일인지 모두가 두상이 없다.
관원의 말에 따르면 6․25전쟁 중에 인민군이 쳐들어와서,
도끼 등으로 불상을 내리치고 파괴하여
웅덩이 속에 수장시켜 내버린 것을 건저 냈지만 모두 두상이 없었다 한다.
두상이 없어졌다는 말에 나는 흥미를 가졌다.
왜 하필이면 두상이 없어졌을까?
곰곰이 생각 끝에 의문의 실마리를 풀 수 있었다.
말하자면 돌기둥 형식으로 조각하면
불상의 목과 같이 약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외부의 어떠한 물리적 힘에도 잘 파손되지 않을뿐더러
오랜 세월을 지나더라도 최소한의 원형이 보존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장승상이 그렇고 제주도 돌하루방이 그렇다.
토우의 경우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나의 결론은, 조그마한 흙덩어리로
안면과 사지(四肢), 몸통을 최소한의 형태로
최대한의 의미를 부각 시킬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보존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된다고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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