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드니에서 온 편지
부산 해양대학교에서는 매년 상급생이 되면
훈련을 겸한 호주 시드니 항까지 가는 원양항해가 실시된다.
항해 중 적도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때는 어느 배를 막론하고 적도제를 지내야 하고,
시드니 항에서는 참여하는 나라마다
자기 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잔치 행사가 베풀어진단다.
1979년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작업실에 해양대학교 학생들이 찾아왔다.
방문한 요지에 의하면 본교에서는
지금까지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몸에 검정색을 칠하고 괴성을 지르며 창을 흔드는 흑인들의 흉내로 일관 해 왔다면서,
이번에는 우리 풍악에, 우리 탈을 쓰고, 우리 노래를 부르며,
우리 춤으로, 우리 놀이를 하고파 탈 만들기와 놀이를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기특하였고 애국하려는 이 반가운 학생의 요구를 누가 마다하랴!
당장 탈 만들기부터 시작하였다.
얼마 후에 시드니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해양대학생들의 소식이었다.
말라카해협을 통과할 때 우리 방식으로 고사를 지내고
시드니 부두 광장에서 거행된 행사에서 독특하고 멋진 우리 놀이를
관람한 각국의 많은 참가자들로부터 받은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는데
대한 남아의 기상을 만방에 떨친 이 자랑스러움은
모두가 선생의 덕택이라고 현지에서 감사의 뜻을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항해를 마치고 귀항하자마자 학교에서 초청이 있었다.
넓은 강당에 모인 전교생은 박수로 맞이해 주었으며
나는 민속에 관한 몇 마디의 강의도 하였고
학장으로부터 감사장도 받았다.
서독에 우리나라 간호사들이 인력수출의 명목으로 많이 갔다.
각국에서 모여든 간호사들이 자기 나라를 자랑하는 장이 베풀어 진다한다.
그 행사에 쓸 탈을 부탁하기에 선물로 주었다.
얼마 후 소식이 오기를 색동저고리와 분홍색 짧은 치마에 탈을 쓰고
아리랑 노래에 맞춰 춤을 췄더니 최고로 환영을 받았다고 감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여러 차례나 나는 탈을 제공한 것이다.
* 고동껍질형 학춤
1981년 10월
전국민속놀이 경연대회가 인천시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여기 이 대회에도 내가 안무,연출한
5인조군무(五人組群舞)로 참가하였는데
이날 날씨는 몹시도 쌀쌀하여 가벼운 연희복에는 감기들만 한 날씨였다.
대회가 끝나는 시점에서 총평에 나선 김천흥(金千興 중요무형문화재제1호 예능보유 소금, 승무)선생의 말씀이
시종일관 동래 학춤에 대한 찬사로만 평하는 것 같아
나를 위시한 동료 모두가 기분이 매우 좋았다.
총평이 끝난 후 김천홍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이 좋은 춤을 5인 군무로 할 것이 아니라
100명이고 200명이고 대형 군무로 확대하고
악사(樂士)숫자도 늘리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규정상 대형은 못하게 하고 있지 않느냐?”하였더니,
“그것은 말뿐이고, 동래학춤 같은 춤은
인원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보기가 좋을 것이 아니겠느냐?”하였다.
그래서 동래학춤 군무를 고안한 것이 오늘날의
고동껍질형(또아리형) 동래학춤군무인데
아무리 많은 인원일지라도 빙빙 꼬아 돌아가면서 춤추는 데는 지장이 없다.
* 말뚝이와의 첫 만남
1981년 10월 전국민속놀이 경연대회가
계기가 되어 말로만 들어왔던 서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인천(仁川)에 처음 온 것이다.
인천에 가면
중국인이 경영하는 중화요리를 꼭 먹어 보라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서
집사람을 올라오라고 연락을 하였더니
작은 며느리의 보호를 받으며 도착하여 함께
인천에서 중국인의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인천 행사를 모두 마치고 하부(下釜)할 즈음에
서울 국립 중앙 전시관에서
한국의 탈, 국보, 문화재급 전반에 걸쳐
특별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일행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서울 국립 중앙 전시관으로 향했다.
전시관에는 하회탈(원형)을 비롯해서 귀중한
고유 탈들 모두 전시되어 있는데
내가 꼭 보고 싶어 그렇게 원했던
동래말뚝이 탈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끝내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에 찾아 들어가서 담당 직원에게 문의 하였더니
동래말뚝이 탈은 바가지로 만든 오래된 탈인 만큼
파손이 염려되어 그 탈만은 전시가 금지되어 있다고 하였다.
옛날의 말뚝이 탈이 실제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기 한량없었다.
모처럼 왔으니 보여 달라 했더니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꼭꼭 가둬 놓으면 썩은 보배와 다름없지 않으냐 했더니
어이없게도 외국인 민속학자가 오면 공개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에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 사람이 중하느냐 우리 사람이 중하느냐면서
옥신각신 2시간이나 싸웠다.
마지못해 나는 최후수단으로 그 탈의 임자는
서울중앙박물관이 아니라 바로 내다!
나는 동래야류탈 만드는 기능보유자다.
가령 내가 보기 싫다 한다 할지라도
이 탈을 가지고 가서
고증 삶아 대대로 후계자에게 전해 주라고 해주어야 할 게 아니냐?
직접으로 간접으로 국가가 지정 해준 보유자가 왔어도
보여주지 않는 몰지각한 행정이 대관절 어느 나라에 또 있겠느냐? 며
항의하였더니 비로소 보여주겠노라고 승낙하였다.
잠시 후 직원 두 사람이 지하실에서 옮겨오는
회색의 기다란 나무상자가 아주 조심성 있게 책상 위에 놓여졌다.
뚜껑을 열고 솜 같은 것이 든 손바닥만한 봉지들을
차례차례 거두어 내니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말뚝이는 물론
예상치도 못한 양반탈 한점도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감개무량한 이 감격적인 순간의 감동은 어디 비할 데가 있을까!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한 일본인이 골동품을 가득 넣은 상자 하나를
가지고 일본으로 갈려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어느 사람에게 맡겨 두었는데 그 속에는 한국,
중국의 골동품들과 말뚝이 같은 탈도 섞여 있더라는 것이다.
그 상자를 맡았던 사람은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경주박물관에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다.
『부산시립민속예술관』관장 재임 당시에
혹시 말뚝이의 원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지인(知人)인 민속사진작가 박진주(朴珍柱)와 함께 경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찾아간 연도와 날짜는 기억에 없지만 마침 박(朴)관장이
석굴암 가는 토함산 길을 처음으로 포장하여
개통식 행사에 참석하기위해 공석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그리고 일년 후 기회가 있어 박씨와 다시 경주로 갔다.
그때는 이미 박 관장은 타계하시고
서울에서 새로 부임해 왔다는 관장을 만나 뜻을 이야기 하였더니,
관장의 말이 “나는 부임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 상자가 자물쇠로 잠겨져 봉인이 찍혀 있는 관계로
임의대로 열고 닫을 수 가 없다”하였다.
일단 단념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경비원 한 분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가운데 탈 이야기를 하였더니,
여러 번 다녀간 사람 중에 상자 뚜껑을 열고
탈 사진을 찍고는 자물쇠에 봉인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S 대학교 민속학자 L 교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교수로서 특히 우리 민속을 널리 보급하고 계승시키는
책임자의 위치에 처한 민속학자가 민속자료를
개인 소유 인양 말뚝이 탈을 감금해 놓고
책임 있는 전문가까지도 볼 수 없게 숨겨 왔던 것이다.
나는 과거 경주박물관에서 이미 보았어야만 되었을 탈이었지만
지금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약간은 씁쓸한 심정이었다.
양반탈은 송석하 선생의 유고 사진과 똑같았는데
면상에 실밥만 남아 있고 눈썹과 수염은 없었다.
말뚝이는 L 교수만이 내놓은 사진과 꼭 같은,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말뚝이 탈이었다.
사진을 찍으려 하니 한 컷에 4000원씩 받아야 된다고 하였다.
사진 값이 문제냐! 속속히 관찰하고 사진 촬영도 했다.
촬영 값을 주겠노라 하였더니 차마 받을 수 있겠느냐면서
사양함과 동시에 대하는 태도가 더욱 부드러워 졌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이 말뚝이 탈은 1930년대 탈로써
안쪽에 김용우(金鎔佑) 작(作)이란 서명(書名)이 분명히 되어있으며
현재까지 발표된 동래 말뚝이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앞에서도 기술하였지만 이렇게 발굴하고 고증 받은 말뚝이 탈을 부정하고,
눈이 막혀 있는 등 현재 사용하는 말뚝이를 고집하는
동래『민속보존협회』의 처사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과거 사람들이 말뚝이 눈을 뚫지 않고
막힌 채 사용했다 하더라도
오늘 날에 와서는 편리성과 기능성을 감안하여
눈구멍을 뚫어야 진보적인 발전인데,
하물며 과거에 뚫린 눈구멍을 막아버렸으니
이것은 조상들이 이룩하여 놓은 수준 높은 문화를 오히려 퇴보시켜버린 결과가 된 셈이다.
* 제4회 천재동 단독 『시민위안민속대잔치』를 마치고
1983년 제3회 천재동 단독주최《시민위안민속대잔치》를 마치고
이듬해인 1984년도에 개최한 제4회《시민위안민속대잔치》는 또 하나,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 내 마음속에 짙게 남아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취타대(吹打隊)가
유일하게 부산에 있는 구포여상(龜浦女商) 한 학교 밖에 없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준비위원회에서는
구포여상 취타대를 올림픽 개막식 행사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본 취타대를 내가 개최하는 시민위안잔치 행사에
참여 해 달라고 김영길(金英吉)교장에게 요청하였더니
교장은 여태껏 취타대원은 50인조였는데
올림픽을 대비해서 배수인 100명으로 확장 중이라서
여러 가지 준비 관계로 참가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지못해 김 교장과의 절친한 관계인
부산교육대학교 부속국교 정정봉(丁正奉)교장에게 협조를 의뢰했다.
두 분 교장이 전화 통화를 통하여 협조할 것을 승낙 받은 것이다.
제4회 시민위안민속잔치 제 1부에 있어서
우리나라 유일의 취타대가 부산의 대표적인 거리 광복동에서
그 자랑스러운 자태를 부산 시민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
천재동이라는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이 출연시켰다는
사실로 나의 자랑 중의 하나로 삼고 싶다.
이날 대한민국에서 하나뿐이었던
구포여상(龜浦女商) 취타대(吹打隊)의 연주와 풍물패의 장엄한 풍악 소리,
각양각색(各樣各色)의 깃발을 휘날리며
행렬하는 광경에 놀란 수많은 인파가
광복동 거리 대로변을 가득 메웠고,
고층 건물 창문을 통하여 환호하며 내려다보는 관중들,
일대 장관이었다.
광복동 거리 길놀이는 400명 이상의 인원이 동원되어
길놀이가 끝나면 출연자들에게 빵 한 봉지씩을 나누어 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광복동 뉴욕양과점에 빵을 주문을 한 것이다.
박한기(朴漢基) 사장은 천재동이 좋은 일 하는데
내가 가만있을 수 있겠느냐면서
반액은 내가 부담하겠다면서 흔쾌히 협조해 주시는가하면,
제 3부 작품전시장의 대관료도 무료로 하는 등
아낌없이 성의를 베풀어주었다.
제 2부의 시민회관에서의 공연에는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밀양(密陽)의 하보경(河寶鏡), 김타업(金他業), 김상용(金尙龍) 세 사람의
문화재(文化財)외 김(金), 권(權)양씨로 구성된 밀양별5고무(密陽別五鼓舞)의
우정출연(友情出演)으로 막을 올린 것이다.
작년 3회 공연에서는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공연했을 때는
인파로 인해 입구의 유리를 깬 소동까지 있었던 관계로
이번에는 대강당에서 공연하기로 한 것이다.
생각대로 대 만원이었다.
밀양 별5고무는 우정 출연이라 할지라도
멀리 밀양에서 와 준만큼 나도 답례의 표시로
기차 비라도 줘야 인사가 아니겠느냐 고 생각하였으나
나에게는 한 푼의 돈도 없었다.
부득이 빌릴 수밖에 없어 객석을 살펴보니
내가 지도하는 모 고교 교감선생이 눈에 띄었다.
마침 잘 됐다 싶어 살짝 돈 2000원만 빌려 달라고 하였더니
가진 돈이 없다 하기에 딴 좌석을 물색 중에,
밀양 패들이 우리 역할은 마쳤다면서 가겠노라고 인사를 하였다.
조금만 기다려 주면 차비를 마련해 오겠다고 하였더니
40원이면 금방 밀양에 도착할 것인데 무슨 차비가 필요해 하고는 가 버렸다.
공연은 모두 끝났다.
관중도 출연자도 모두 다 가 버리고 나 혼자 무대에서
멍하니 서 있으니 조명실에서는 우리도 자야 하니 어서 나가 주시오 한다.
쫓기듯 바깥에 나와 보니 앞이 캄캄했다.
우선 전차나 버스를 탈 돈이 10원도 없다.
나는 누구를 위해 틀림없이 종을 울렸는데,
나를 위해 종을 울려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당시 시민회관 전면에는 넓은 공지로 집한 채 없을 때고
당장 시급한 것은 돈 10원이다.
어떻게 해서 집으로 갈 것이냐?
이런저런 생각 중에 아닌 게 아니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침 그때 저 편에서 독특한 음성의 소유자
김원(金原, 당시 미협이사장) 화백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끝난 모양이지 컴컴한데……” ,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거야?” 등등의
말을 주고받고 하면서 한 열명 남짓한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참말로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격이었다.
미협 이사회를 빨리 끝내고 달려온 것이라 한다.
늦게 온 죄로 술을 사는가 하면 택시까지 태워 보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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