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가지 유언
1984년 지방무형문화재 제4호〔동래지신밟기〕김영달(金永達) 풀이 보유자가 타계했다.
김영달은 승려증을 갖고 있는 무속인으로
무속지화장(巫俗紙花匠)으로 한국의 제일인자의 명인이다.
민속학자 심우성(沈雨晟)은 김영달, 김수재 부부의『꽃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까지 작성하여 문화재 관리국에 올렸으나,
문화재 관리국에서는『꽃일』의 중요성에 대한 무관심으로 취소된 바 있다.
9세 때부터 울산(蔚山) 웅촌리(熊村里)에 살면서
『울산 웅촌외막지게 목발장단놀이』를 배워 보유하고 있었다.
김영달은 자기의 운명을 미리 짐작했는지 모르지만
타계하기 전에 나에게 두 가지를 남기고 싶어 부탁 해온 것이 있었다.
당시 자택이 부산 해운대 송정리(松亭里)였는데
자택에 방문하니『울산 웅촌외막지게 목발장단놀이』의 놀이 전모를 기록하게 하고,
또한 송정 뒷산에 가서 놀이 실태를 영사기로 촬영도 하였다.
지금 놀이의 채록과 영사 필름은 내가 보관하고 있으며
기회를 보아 울산 문화원에 기증할 예정이다.
김영달은『꽃일』을 오랫동안 같이 해 온
그의 부인 김수재가 자기보다 솜씨가 더 있다면서,
나는 이미 늦어서 할 수 없지만 내 안사람을 지방 문화재라도 좋으니
천 선생의 힘으로 문화재가 되도록 힘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부탁의 말이 결국 유언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해 부인을 만났더니
그의 장남이 아버지 대에서 무당은 끝난 것이다.
어머니와 그 자식들은 무당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결사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김영달 무속은 김영달 일대로서 끝나고 말았다.
*진정한 동참
1988년『88올림픽』의 해다.
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민속놀이 행사로 출연할 때마다
나는 연출자로서 활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내 개인의 이름으로 88올림픽에 성화 봉송의 한 주자로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자랑스러웠고 그때 성화 봉송 주자 기념품으로 받은
네모진 금색 탁상시계가 내 머리 맡에 자랑스럽게 놓여 있다.
1991년『민족통일대동장승굿추진위원회』에서
주최한 제4차 부산 금정산 장승 굿 행사에
내가 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지리산을 거쳐 문경 새제, 계룡산 다음으로 네 번째 행사인데
장차 백두산에서도 장승 굿을 할 날을 기대하면서,
젊은 부산의 회원들은 물론 전국에서 모여온 주체 요원 장정들이
동래 금정 산하에서 금성동 산성 마을 현장까지 장승 원목을
교대해 가면서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과정이 장관이었으며,
또한 10m 높이의 장승을 조각하여 세우고,
통일을 염원하는 춤도 곁들여 한층 더 진지하고
엄숙하여 전 과정이 정말 대축제 분위기 그대로 이었다.
『민족통일대장군』․『민족평화여장군』글씨는 내가 쓰고
금성동장(金城洞長)은 제주(祭主)가 되어
행사가 끝날 때까지 민족 통일의 염원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기던 일을 잊을 수 없다.
* 금혼식을 작품 발표회로
1994년 천재동, 서정자 부부(夫婦)결혼 50주년 기념일이다.
기념식을 올릴 장소를 물색 한 결과
전시장과 무대를 갖춘 곳은 대청동(大廳洞)에 있는 카톨릭센타 한 군데 밖에 없었다.
전시장에서는 식장(式場)겸 작품을 전시키로 하고
극장에서는 천재동작〔중매소동(仲媒騷動)〕단막극을
극단『도깨비』단원들의 출연으로 기념 공연을 한판 올리기로 했다.
먼저 기념식과 함께 많은 하객들로부터 축복을 받고,
다음 장소인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연극을 감상하게 하였다.
다시 전시장으로 되돌아와 개전(開展) 식을 하는데,
과거에 대바구니로 만들어 두었던
직경 1미터 크기의 초대형 말뚝이 탈을
전시장 벽에 걸고 하얀 천을 덮어씌워
좌우 양편에서 천에 묶은 줄을 당기면
천이 벗겨지면서 말뚝이가 나타나는 제막식 행사에
하객들의 환호와 함께 오픈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편에서 줄을 당기는 사람은
이 자리에 참석한 하객 중에 제일 연배가 높았던
먼 구름 한형석(韓亨錫, 83세)선생과
가장 나이 어린 유치원생 이 두 사람이
양편에서 줄을 당겨서 천을 벗기게 하여
유래 없는 개전 식이라고 입을 모았다.
전시 출품 작품은 그림, 탈, 토우 세 분야인
나의 작품 외 영배(英培)․ 영광(英光) 두 아들의 회화와
아들과 다름없는 후계자 이석금(李石琴)의 탈과 토우를
찬조 출품하여 부자전(父子展)으로 이채롭게 개최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 화환을 거꾸로 세운 사연
82세 되던 해인 1997년 울산시와 방어진읍을 위시해서
근교 여러 지역을 편입해서 국내 일곱 번째의 울산광역시가 탄생했다.
승급(昇級)을 축하 하는 여러 가지 기념행사 중에 “울산사람전”이
『울산시립종합미술관』에서 개막되었는데,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1904〜1948),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 선생의 유물전과 함께
천재동(千在東)도 추대 받아 작품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송석하 선생은 민속학의 선구자로
어려웠던 일정 하에서도 한국의 얼을
낱낱이 사진과 채록으로 오늘에 남겨 준 학자요,
최현배 선생은 아시다시피 한글 학자로서
우리가 쓰고 읽고 말하는
모든 우리 글 문화를 발전시켜 준 분으로,
위 위인들과 함께 지금 살아 숨쉬고 있는 소인을
한 자리에 넣어 준 울산광역시 당국의 호의에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개전과 함께 전시장 입구에
시장, 시의회 의장, 기타 울산 명사들의
축하 화환들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지만
초대한 현장에는 폐전 날 까지 그 사람들은 얼굴을
한 분도 내 보이지 않았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값비싸고 화려한 장식으로
얼굴을 대신하려는 주인의 상식 밖의 처사에 분노한 것은
다름 아닌 송․최 두 어른의 뜻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생각해 불 때
나로 하여금 화환을 거꾸로 세워 둘 수밖엔 없는 심정이었다.
마침 관내 미화원 들이 몰려와서 화환들을 바로 세우고 있기에,
이러이러한 사연으로 거꾸로 세운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였더니
미화원들은 내말에 동감하여 손뼉을 치는 것이 마치 그들의 원성을 푸는 것 같았다.
* 관람 매너 만점!
1998년 경기 도청에서 초대를 받아
수원시(水源市) 도립미술관에서『우리 탈, 우리 토우, 우리 민요화』이름의
세 분야 작품 300점의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작품을 전시해 놓고 감상하러 오시오! 가 아니고,
며칠 몇 시에는 어느 유치원생이 관람하고,
며칠부터는 초등교, 어느 날 어느 시에는 중, 고생
또는 대학 새마을 등 등 계층별로 관람 일정표를 수립하여
관람하도록 한 결과 도민들의 관심도는 물론
질서 의식이 매우 높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계획을 세워서 관람케 해서인지 하루 종일
전시장에는 관람자로 성시를 이루니 작
품전을 유치한 당국이나 작가 당사자 모두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사인하느라고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특히 우리나라 바가지탈의 우수성과 제작기법의 다양성,
토우가 말해 주는 생활상,
전래동요를 곁들인 풍속민요화 모두가 학습에 도움이 된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여 일주일을 더 연장하자는 요청에 응하여
그야말로 시종 기쁜 마음으로 대성과를 거두었다.
경기도 지역이 넓어서
일산 지역 등의 주민들은 관람을 못하였기 때문에
내년에는 전시장을 그쪽으로 옮겨서
전시회를 하자는 간곡한 요청도 받았지만
300점이 넘는 작품을 수송할 때 파손될 우려가 크고 설
치하는데도 너무 힘들어서 고맙지만 사양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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