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9. 미국 전시회를 거절한 이유

무극인 2008. 6. 28. 18:22
 

* 미국 전시회를 거절한 이유

해외 전시회를 두건 거절한 첫 번째 이야기는,

어느 해 미국 주재 우리나라 공관(公館)직원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한국의 공예품을 소개하는 뜻에서,

 김봉룡(金奉龍) 통영 나전칠기 작품을 목표로 삼아

 작품들을 보았는데 전시장의 설비,

운송 관계 이것저것이 조건에 맞지 않아,

 문화재 관리국에 의뢰하였더니

전시효과로써는 천재동 바가지탈이 가장 적합하다 해서

당신을 찾은 것인데 그리 알고 준비하시오!

 하면서 계획서를 제시해 보였다.

 대충 들여다보니 주최는 대한민국, 주관 미국주재공보관,

뉴욕, 인간문화재 천재동작품 등으로

 전시장이 어마어마하게 큰데다가

 어느 호텔에 투숙하고 아침 몇 시에 일어나 어디서 주스 마시고,

 어디에서 식사 그리고 커피를 마시는 것까지

 섬세하게 기재되어 있고 또 몇 날, 몇 시부터

 어느 도시 관광 등으로 짜여져 있었다.

 끝으로  강한 어투로 하는 말이

 전시 현장에서 탈 제작하는 실제 과정을

관람자에게 보여 주어야 한단다.

 공구 일체도 지참하라는 둥 당사자의 의사도 묻지 않고

 처음서부터 끝까지 거만한 어조인데다

명령적인 데에 나는 질색하고 한마디로 딱 거절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인정한 문화재가 왜 외국에서

외국인 앞에서 작업을 해야 되나,

우리 주권을 지키는 자세에서 떳떳이 과시 좀 해 봅시다.

 미국의 민속촌에서 보잘 것 없는 공인이

작업하고 있는 그런 꼴을 나는 할 수 없다고 했더니

관료(官僚)양반은 노발대발하면서 정신 잃은 사람과 대화가 안 되겠다며

계획서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돌아서고 말았다.

 

* 일본 전시회를 거절한 이유

1987년도로 기억되는데

 두 사람의 일본인이 대신동(大新洞)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일본 명고옥시(名古屋市) 명철백화점(名鉃百貨店)에서 출장 왔다면서

참 너그럽고 호감을 주었다.

마침 친구 장지완(張志完, 교육자)도 와 있었다.

용건을 말하기 전에 잡담부터 벌어졌다.

나는 명고옥 명철백화점 직원이고 이 사람은 나의 친한 친구로

한국 부산으로 간다니까 같이 온 것인데,

우리들은 부산을 내 고향으로 생각한다.

 친구를 따라 왔다는 다른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내자식 놈도 데리고 왔습니다.

 한국은 내 자식의 조국이요 부산은 자식 놈의 고향입니다.

 2차 세계 전쟁 종전까지 부산에서 살았는데

종전 뒤 일본 동경으로 돌아가

 학교에 넣기 위해서 학교를 찾아갔더니,

 난다 조생 가에리까? (뭐라 조선서 돌아왔다고?)하면서

입학을 시켜 주지 않았다.

학교마다 다 그런 지경이었다.

그 사정을 알고 이 친구가 명고옥으로 오라 해서,

입학도 하고 지금 친구와 같이 살고 있다.

 나는 분명히 일본인이다.

 일본인이 자기 나라에 돌아왔지만 한국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자식 입학까지 거절할 때야 일정(日政)때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멸시를 당하고

구박 속에서 살아 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산이

내 고향이요 내 자식에게는 조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산 어디서 살았느냐 물으니

동광동(東光洞)이라 면서

어제 도착하여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옛날에 살던 집을 찾았더니

그대로인데 대문을 동쪽으로 내고

불고기 집을 하고 있더라 하고 다시 말을 이어,

주인을 만나 옛 이야기도 하고 불고기도 먹고

친해졌는데 지금 내 아들놈은 거기에 있다.

 점심은 뭘 먹었냐고 물어보니 이쪽 친구 말이

「비빔밥」이라고 어설픈 우리말에 모두가 허허하고 웃었다.

본론에 들어가서 말인즉 나의 탈 작품을

『명고옥 명철백화점』 전시장에 유치하여

 작품전 갖기를 권유하기 위해 왔단다.

 백화점은 명고옥철도 직영으로 7층은 전체가 전시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국 명작들을 많이 전시하는 전시장으로,

이번 부산의 탈바가지 작가인 천재동과

 서울의 문화재 매듭 작품과 전시장 둘로 나누어

한국의 문화재 작품을 전시하기로 계획하고 작품도 보고

동의를 얻기 위해 온 것이라며 추가해서 하는 말이

 명고옥은 동경과 대판 사이에 있는 일본 셋째 가는 도시로

한국 거류민 본부가 바로 명고옥에 있어서

전시 시기에는 북해도로부터 구주까지의 거류 한국인들이

 전부 전시회 보려고 모여들 것이다 했다.

 조건도 좋았고 해서 나는 단번에 승낙했다.

 다음에 구체적인 계약을 맺기 위해 딴 사람이 올 것이라 하고 헤어졌다.

얼마 후 두 번째로 사람이 왔다.

작품 수와 팸플릿 작성에 필요한 제반 준비와 제작 과정 등

영사촬영과 슬라이드 관계는 다음 3차 때 와서 모두 마무리 짓겠노라 했다.

나는 나대로 모든 준비를 끝내고

 3차 사람이 오기만 기다렸다.

 60대의 사람이 왔다.

화가이면서 전시장 관장이라 하였다.

 이야기는 모두 합의가 되었는데 뜻밖에 현장에서 작업해 주어야 하고,

 작업 과정을 영사로 촬영해서 백화점 구석구석에

 방영하는데 때로는 슬라이드로 선전 소개도 한단다.

 영사촬영은 귀국하면 요원들을 곧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현장에서 꼭 작업을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매듭도 현장에서 작업하기로 했으니

 선생도 작업해 주어야겠다 한다.

 영화와 슬라이드로 각 실에 방영한다는데

 현장 작업은 무슨 필요성이 있나? 하였더니

각국 작가들은 다 하고 있다기에,

 나는 그렇더라도 못하겠다.

한국 문화재의 위신 문제요,

회사 방침에 따라 현장 작업 실기는 필연적으로 해주어야 한다.

옥신각신 하다가 홧김에 “여보시오

 식민지 시대의 근성을 버리라고

회사 제일 높은 사람에게 전하시오!”했다.

 그 사람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아무 말 없이 돌아서 가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