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31. 영겁의 포옹

무극인 2008. 7. 24. 10:10

 

⑴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릴적에 낫이나 칼로 총, 칼, 인형 같은 것들을

손가락에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즐겨 만들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나더러

“그놈 할아버지를 닮아서 재주가 이만 저만이 아니구나”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꽃바우(花岩) 고개를 넘어

할머니 친정인 화잠(花岑)마을에 갈 적에

고갯길에는 드문드문 집들이 있었고

 길가에는 그물로 온통 울타리를 둘러싼 작은 채전밭에

 참새 무리가 내려앉아 무언가 쪼아 먹고있는 것을 보았다.

화암산에 아담한 암자를 지어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할머니의 동생이 되시는 보살할머니를 비롯하여

동행한 여러 사람을 제자리에 서있게 해 놓고

가만가만 채전밭으로 접근하였다.

 천둥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벼락처럼 돌을 냅다 던졌더니

기대하였던 대로 참새 한 마리가 그물에 걸려 퍼덕이는 것이었다.

“야가 할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동행한 여러 사람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물에서 걷어내느라고 깃이 많이 상한 참새를 꼭 잡으니

 따스한 체온과 함께 화닥화닥하는 심장의 고동이

손아귀에 느껴지면서 놓칠세라 꽉 잡아 쥐고

 목적지에 도착하였을 때 참새는 이미 죽어 있었다.

길을 가면 사람들이 “천호방댁 손자가 간다 ” 면서

손도 잡아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어떤 어른 한 분이 “ 할아버지 닮아 잘 생겼다” 하시면서 훤하게 웃으실 때

내 눈에 들어와 비친 금이빨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인품을 짐작 할 수 있어서 자랑스럽고 행복함을 느낀다.

할아버지는 평범한 농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 천호방네”란 호칭을 받을 만한 좋은 일들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할아버지 처가는

한국 유일의 포경선(捕鯨船)의 근거 항(港)인 장생포가 건너 보이는

방어진 반도의 울산만(蔚山灣) 동편 조그마한 어촌 화잠(花岑)마을,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단 한 채의 큼직한 기와집이다.

당시 일본 수산계에서 가장 탐을 내는 3대 어장(漁場)은

 신포(新浦 명태), 영일(迎日 청어), 방어진(方魚津 방어)이었는데

그 중에서 방어(?魚) 잡이 대부망(大敷網)의 소유자인

 학성(鶴城) 이씨(李氏) 집안으로 동·면장을 배출시킨 명문가(名文家)이다.

할아버지는 단신으로

문전옥답인 삼밭골(麻田谷) 이모작 논 열아홉 마지기를 이루었고,

 다시 화암의 화암산(花岩山) 일부와 거기에 딸린 논과 못(池)을 소유하였으며

 점차로 멀리는 경주 방면에도 전답(田畓)을 마련하였다.

학성(鶴城) 이씨(李氏) 가문의 어른들이 오가는 길머리에서

 재주 좋고 논밭을 잘 가꾸는 부지런하고 알뜰한 농사꾼을 발견하고,

 학식을 갖춘 젊은이 보다 소박하고 근면한 젊은이를 사위로 맞아들인 것이라고 짐작한다.

입신출세한 농민이오 주민에게 자선(慈善)을 아끼지 않았던

 할아버지에게 관민(官民) 모두 “천호방네 ” 라 호칭한데 대하여

그 사유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⑵ 할머니

할머니께서는 일흔일곱에 돌아가실 때까지 나를

 당신의 밥상 옆에 앉혀놓고 밥을 먹여주셨고

주무실 때도 한 이불 속에서 품에 꼭 안고 주무시는 등

자나깨나 이 손자를 극진한 정성으로 위하는 일을 낙으로 여기면서 사셨다.

밖에서 놀다가 돌아오면 이마를 쓰다듬어 보시기도하고

 머리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아보시는 것은

 위험한 바닷물에 들어갔나를 확인하여 보는 것이다.

할머니는 틈틈이 천량괘(千兩괘: 서류나 돈을 넣는 괘) 속에 간직한

엽전 꾸러미를 꺼내 세어보는 것을 또 하나의 낙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는 일본 화폐와 엽전을 동시에 사용하던 시대였다.

할머니께서는 치마 안에 두 개의 주머니를 차고 계셨는데

털실로 짠 주머니는 오십전 짜리 이하의 동전을 넣어 계셨고

 천으로 깁은 것에는 일원 짜리 지폐가 차곡차곡 잘 접어 넣어 계셨다.

 어느 날 잠자리에서 할머니께서는 전혀 모르실 것이라 생각하고

차고 주무시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돈을 훔쳐내었다.

 훔친 돈으로 왕양(王樣)크레용을 사려고

 일본인 고또오(後?)가 경영하는 상점에 들려 요금을 지불하려고

지폐를 꺼내었을 때 큰 돈에 놀란 고또오가 당장 점원 긴상(金氏)을

우리 집에 보내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황치는 물감을 산다기에 이 할미가 준 돈인데 무슨 말을 하노!” 하고

 호통을 쳤을 때 당황한 점원은 쫓기듯 급히 되돌아갔다.

어느 날 우리 식구가 저녁 식사를 끝내자 날더러

 “저녁밥을 먹는지 못 먹는지 상우네 집에 가서 보고 오너라 ” 하셨다.

상우네 집에 가서 보니 십촉 전등 아래 파란 양푼에

 안남미 쌀밥을 놓고 어른 아이 여섯 식구가 둘러앉아

옥닥옥닥 떠먹고있는 광경을 보고 돌아와서 할머니께 말씀드렸더니

 당장 머슴 편으로 쌀 두말을 보내드렸다.

할머니 생전에 제사를 모셨을 때나

평소에 이웃과 나누어 먹기 위해 만든 떡 등

음식 운반용 함지박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를 내가 간직하고 있었다가

 60년대 당시 Y교수를 통하여 부산사범대학 박물관에 진품으로 기증하였다

 이 한아름 반 크기의 함지박은

고모부(姑母夫) 김진호(金鎭浩) 어른께서

울릉도 산(産) 향목(香木)으로 빚은 것으로

할머니의 정(情)과 향(香)이 배어있는 값진 물건이다.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오래 전부터

 병상에 누워있었던 관계로 그 많은 가사(家事)들을

 서사(書士) 김서방을 비롯하여 머슴들을 다스리고 관리하신 여장부였다.

아버지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어 감에 따라

경주(慶州)를 비롯한 여기저기에 산재한 전답들이

 하나 둘 남의 손에 넘어가면서 곡식 섬을 싣고 오던 당나귀들의 운반 횟수도 줄어져 갔다.

방어진 화암고개 너머 학성 이씨 가문의 심창(深窓)속 규수로서

 평범한 농부인데다 2대 독자인 천씨 가정에 시집와서

수려한 용모답게 미녀 딸과 미남 아들 하나씩을 낳아주신 것이다.

 

⑶아버지

1910년쯤부터 방어진은 일본인 천지가 되고 말았다.

 산림을 허물고 그 흙으로 자갈밭을 매축하고,

2~3층 일인(日人) 목조 가옥들이 들어서고,

통통 동력선(動力船)이 항구를 메우더니

어느 사이에 청루(靑樓)골목도 생기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샤미센(三味線) 선율에 맞추어

노래와 춤이 주야로 끊이지 않았으며

 계절도 잊은 채 방어진은 일인들의 문화 이전과

환경 개발로 몸살을 앓는 소리가 온통 천지를 울렸다.

대여섯 살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을 때

 항구 앞 바다에 정박한 전함에서 때때로

그들의 위세를 떨치기 위하여 공포로 쏘아대는 시위는

그들의 침략 근성을 그대로 나타내고도 남았다.

한·일 혼합소방대도 조직되었고

펌프식 소방기 두 대를 갖추고 소방방화 기본 훈련이 때때로 전개되었다.

이름하여 방어진의용소방대, 대장은 일인(日人) 하시쯔메(橋喆),

선발된 소방수들은 옛 신라시대 복식과 닮은

“합삐”라고 부르는 제복을 입고 활동을 하였는데

아버지께서도 그 일원으로 “고가시리(小首) ” 란 계급으로 활약하셨다.

 100명 가까운 대원들의 기념사진 속에 우뚝하게 돋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주변 인물들과 대비가 되어 강조됨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천호방 집안의 삼대독자(三代獨子)로 태어나 건장한 육척 체구요,

총각시절에는 많은 여인들을 울렸다는 성은 천(千)이요 이름은 수(壽)자 복(福)자 이시다.

당시 방어진은 오방설(五方說) 그대로 오동촌리(五洞村里)로 나누어져

 동방은 김씨가 촌장이 되어 김동촌(金東村)이라 불렀고,

서방은 황서동(黃西洞), 남방은 ×남동(南洞)네, 북방은 녹두 북동(北洞)네,

중앙은 천중리(千中里)라 불렀다.

우리 집은 서동에 있었는데도 중리(中里)를 천호방 댁에서 맡아 주어야 한다는

사방(四方) 촌장들의 중론에 의해 결정되었다.

5동촌(五洞村) 이장이 방어진을 다스리는 외에

 토박이 34세대주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5동촌 이장이 결의한 사항을 토박이 34세대주가 동의만 하면

무슨 일이라도 관청에서는 인정해 주었다.

방어진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위한 사전 모임은

우리 집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고

농주와 안주감도 늘 마련되어 있었다.

삼대독자로 호강 속에서 존경받으며 건강하게 사시면

 일찍부터 “ 식사(食事)는 술이요 반찬은 담배이다” 할 정도로

술과 담배를 좋아하신 탓이었는지 어느 날 병석에 눕게되었다.

시끼시마(敷島)란 담배는 개비마다 빨대가 붙어있는 것으로

 최고품이었는데 이를 하루에 두 갑씩이나 피우신 데다

 약주 또한 무척 좋아하셨으니 육신을 건강하게 유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이 뻔한 일이다.

오오쿠시(大患)공의(公醫)는 매일 왕진 왔으며

 나이또오(內藤)란 치과의사는 가끔 다녀갔다.

 대환공의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시던 한의사 친척할아버지께서도

매일 오시다시피 하셨는데 때로는 용하다는 의원을 모셔 오시기도 하였고

 어느 때인가 중간 크기의 노루 한 마리를 몰고 오셨다.

잠시 가두어 둘 마땅한 장소가 없어 방안에 밀어 넣었는데

바닥이 미끄러워서 비슬비슬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어린 아이들은 매우 재미있어들하였다.

 얼마 후 사람들이 장독대 뒤 버들나무에 노루를 거꾸로 메달아 놓고

 목대를 찌르고 생혈을 받아 아버지께서 마시도록하였다.

아버지께서 때때로 형님과 나를 병석에 불러놓고

다리를 우리 어깨 위에 걸쳐 올려놓으시고

저희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다루기,

 천자문을 읽게하여 즐거워하시는 표정으로 지켜보시던 일,

 을축년(乙丑年) 왜바람 때 밖에 나오셔서

바람에 흔들리는 대문을 붙잡고 안간힘을 다하여

 태풍과 싸우시던 일,

여러 사람 사이에 앉으시면 우뚝하게 돋보이는 모습,

나를 무릎에 올려놓으시고 한쪽 손에 술잔을 다른 손에는 담배를 쥐시고

친구들과 정답게 담소(談笑)하시던 모습 등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허도령 도난사건과 염포리(鹽浦里) 김씨 노루잡이 엽총 오발사건,

 그리고 호열자(虎列刺) 창궐(猖獗) 시(時)에

 금식(禁食)된 과일을 몰래 먹는 일본인들을 목격하였을 때 등등,

만물상 주인 아리요시(有吉), 에가와(江川) 목욕탕 주인 같은

당당했던 일인(日人)들을 마당에 불러들여 호통 칠 때

그들이 꿇어앉아 “ 하이! 하이! ”고개를 끄떡여 가면서 용서를 바라던

그들 앞에 위엄을 갖추고 서 계시던 아버지의 준엄한 모습은 또 다른 진면모로 나에게 다가온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형제의 손을 꼭 잡으신 후

한마디 유언도 남기시지 않고 운명하시자 곁에서 지켜보시던

친척 큰아버지 되시는 어른께서 거리낌 없이 입으로

아버지의 코를 빠셨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시자 단념하시고 목 놓아 우셨다.

 

⑷ 어머니

옛 신라의 서울 서라벌 땅에

물은 북으로 흐르고 바닥의 모래는 남쪽으로 흐른다는 강이 있고

사적지(史蹟址) 반월성과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서려있는 계림(鷄林)

 그리고 교동(校洞: 옛날에는 교천이라 불렀음) 최부자 집 이웃에 경주 김씨가 살고 있었다.

이 김씨 농가(農家)에 두(斗)자 남(南)자 이름을 가지신

열여덟 된 딸이 멀리 울산 방어진 “ 천호방댁” 

열여섯 살 된 삼대독자 아들에게 시집 온 것이다.

김 두(斗)자 남(南)자께서는 장남 일동(一東), 장녀 기녀(奇美),

 차남 재동(在東), 이녀 기화(奇花), 삼녀 기봉(奇奉)

이남 삼녀를 낳아 주시고 우리 가문의 사대 독자를 면하게 해주신 정말 고마운 어머니이시다.

어머님 댁은 부농(富農) 가(家)이였는데

동생 되는 백수 외삼촌께서는 경주지역의 외가 전답을 관리하는 한편,

 훗날 불국사 부근에 거주하면서

우리 고유 유기(鍮器)를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여 크게 번성하기도 하였다.

외가가 연고가 되어 우리 집 에서도

 경주에 많은 전답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 덕에 나는 일찍부터 어른들을 따라서 경주에 자주 왕래하는 가운데

 일찍이 신라문화를 접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토우(土偶) 등 민속예술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이 분야가 내 삶의 목표가 된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어머니께서도 지극 정성으로 자식을 사랑하셨다.

떡 상자를 어깨에 메고 “호야 호야 겐마이 빵 (몰랑 몰랑 현미 떡) ” 하고 외치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집 앞을 일인(日人) 떡장수가 오간다.

할머니 무릎 위에 앉아 놀고 있는 나를 불러내어

 우리나라 찹쌀떡처럼 현미로 잘 만든 이 떡을 남몰래 먹여주시기도 하셨는데

 떡장수는 우리 집 앞에서는 발을 멈추고

여러 차례 더 큰 소리로 외치면서 반응을 확인한 후에야 이동해 갔다.

또한, 고구마를 가늘게 썰어 기름에 튀겨 바싹바싹하고

구수한 맛을 내는 것을 만들어 행상하는 일본신주(神主) 차림을 한 일인(日人)은

양철로 소리가 나도록 만든 통을 짤짤 흔들며

 “아메가 훗데모 까리까리 (비가 쏟아져도 까리까리)”하며

 노래형식의 소리로 외치며 다녔는데

 이 행상인도 떡장수와 같이 우리 집 앞에서는 잠시 발을 멈추었다.

어머니께서는 손수 인삼 고운 물, 꿀 물 등

몸에 유익하다는 음식물은 빠뜨리지 않으시고 항상 준비하여 두셨다가

 자식에게 먹이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않으셨다.

어린 내가 자라병을 앓았을 때

그날따라 장대같은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큰 삿갓을 쓴 머슴 황서방 등에 업혀

 오마장이나 되는 번덕(番德)마을 천약국(千藥局) 할아버지 댁으로 갈 때

 조그만 삿갓을 썼지만 비에 온 몸이 흠뻑 적셔진 채로

저만치 뒤에서 따라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평소 매사를 정성을 다하여 돌봐주시는데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엄마!”하고 부르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중국산 천은 질이 좋은 만큼 가격도 비쌌는데

 중국포목 상점에서나 중국인 보따리 포목행상에서 구입한

새 천으로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의복을 주로 지어주셨다.

아버지께서 입으시던 옷은 손질을 곱게 하여

나의 옷만 만들어 입혀주시던 일 등

특히 나에게 여러 가지 면으로 각별하셨다.

짚신에서 고무신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는데

여자용 신발은 요즘과 다를 바 없이 코 신발이었지만

남자용 고무신발은 “반(半)고무신 ” 이라 하여

오늘 날 슬리퍼 형식의 신발과 신사용 서양구두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심지어 구두끈까지 딸린 “ 온 고무신” 이 있었다.

온 고무신 즉 고무구두 한 켤레 싸 주시면

아껴서 오래 동안 신으려고 길을 가다가

행인이 없으면 신발을 벗어 들고 가다가

 길에 사람이 보이면 얼른 신발을 신기도 하였다.

 온 고무신은 반 고무신발 보다 네 배 내지 다섯 배나 비싸

 싸 신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온 구두만 싸 신겼다.

 온 고무신은 완전히 생고무로 만들어서

여름 날 맨발로 신고 땀에 젖어서 발바닥이 미끄러지면 죽죽 늘어져도

구멍이 나거나 찢어지지 않고 본래 형태로 되돌아갔다.

또한, 겨울철과 축구 할 때면 그저 그만 이었는데

 반 고무신을 신은 선수는 천이나 새끼줄로 단단히 동여매어야 하지만

나는 끈만 댕겨 조어면 되었다.

내 주변에서 나 외에 온 구두를 신은 친구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서당 강아지 시절에 최초로 먹을 갈아 한지에 천지현황(天地玄黃)……을 써서

 접장 양(梁)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의 말씀과 함께 황토로 동그라미 관을 받았다.

천자문을 잘 써서 영예(榮譽)의 관을 처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나를 아끼는 마음과 더욱 분발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기쁜 나머지 떡을 해서

 머슴으로 하여금 지게에 지고 뒷산 밤나무 과수원을 지나

내리막 논두렁을 건너 양접장 선생님의 서당으로 갈 때

귀한 아들을 일각이라도 놓칠세라 내 손을 꼭 잡으신

 어머니의 따뜻하시던 체온이 지금도 아련히 내 손아귀에 감도는 듯 하다.

아버지의 9년간 병상생활로 인하여

경주 방면의 전답 모두와 화암산(花岩山) 일대 전답마저도 처분되었다.

 선산과 삼밭 골 열아홉 마지기 논과,

집 뒤 밭 두마지기 그리고 집 두 채로

 다섯 남매를 키우시느라고 무척이나 고생하신 어머님이시다.

형님은 형대로 수산업 하노라 삼밭 골 문전옥답을 처분하여

부산 남포동에 사무실을 설치하여 놓고 사업에 몰두하였고,

나는 나대로 만학(晩學)하노라 서울로, 일본 동경으로 다니다 보니

 어머니께서는 자식의 효도를 받지도 못하시고 한 많은 이승을 떠나셨다.

화암 선산에 아버지 옆에 나란히 모시고 주전(周田)에서 진목(珍木)들을 옮겨다 식목하였다.

화암산 화잠리(花岑里) 일대에

현대조선수리공장이 들어서자 택지조성으로

부득불 최후로 조상의 유골을 이장해야 한다는

한차례 전화 연락이 있은 후 소식이 단절되었는데,

풍문에 의하면 장조카가 조상의 묘와 선조께서 물려주신 선산을 처분하였다는 것이다.

숙부인 나와는 사전 상의도 없이 행한 일이라 매우 서운하기 그지없다.

아직도 장조카로부터 묘소 처분 과정과 그 결과를 들은바가 없다.

 

⑸ 6년상주(六年喪主)

할머니께서 건재해 계시는 관계로

 할아버지를 모셨던 선산에 아버지를 먼저 모실 수가 없어서

 부득이 댕바우산 공동묘지를 장지로 정하였고

동편 아래채 큰방에 아버지의 혼백을 모셨다.

형과 나는 상주가 되었고 내 나이 아홉 살이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무엇보다도 금이야 옥이야 귀중했던 삼대독자 아들을 잃은

 할머니의 마음의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 삼년 탈상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께서는 아들의 뒤를 따라가듯이 돌아가신 것이다.

화암(花岩) 선산 할아버지 묘와 나란히 모시고

형과 나는 상복을 벗을 틈 없이 아버지를 모신 빈소에 할머니의 혼백을 또 모셨다.

우리 형제는 6년간을 상주가 되어 두 어른의 영혼을 모신 것이다.

길일(吉日)을 택하여 공동묘지에 모셨던 아버지의 유골을

 선산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 아래쪽에 이장하여 모시고

 백일홍 나무 두 주를 심었는데

이는 장차 우리들 자손들이 묻힐 곳이기 때문이다.

6년 동안 입었던 상복을 벗고 새로 만든 우리 고유한복으로 단장하여

 화암(花岩) 선산 묘지 참배 차 상진(上津: 西區)을 지나칠 때

 방아 찧던 여인들이 방앗간 벽 구멍 난 틈으로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는

“ 천호방네 손자가 지나간다!” 면서 구경하러 우르르 몰려 나와

 방앗간 울타리를 밟고 올라서서 내다보는 바람에

 여인들의 무게에 견디다 못한 울타리가 그만 무너지는 소동이 일어난 사건은 바로 이때였다.

 

⑹ 장인어른

어린 시절에 우리 집 앞으로 지나치는 행인들 중에

유난히 나의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아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갸름한 몸매에 작은 키, 검정양복에 나비넥타이,

 마마자국이 조금 있는 얼굴에는 신념에 가득 찬 듯한 표정으로

앞만 똑바로 바라보고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하며

특히 머리카락을 목덜미까지 길게 빗어 내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동네 꼬마들이 뒤를 따라가면서 “ 사상가다 사상가!” 라 면서

수군거리는가 하면 우리 집 마당에서 놀고 있던 어른들까지

대문 밖을 내다보면서 정말 존경하는 뜻으로 한마디씩 말씀을 던지는 것이었다.

당시에 누에고치를 장려하는 여성을 “양잠(養蠶)선생 ” 이라 하였는데

 옆가리마 소똥머리, 흰색 저고리에 검정색 통치마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구두에 가죽가방을 든 양잠선생이 길을 가면

 “ 와아! 신(新)여성이 간다!” 하고 환호하는 시대였는데,

 하물며 독립투사가 길을 갈 때면,

나라와 주권을 송두리째 남의 나라에 빼앗긴 것을 알고 있는 동포라면 환호만 하였으랴?

후일 철이 들면서 그분의 존함이 서진문(徐鎭文1901~1928 독립유공자) 선생임을 알게 되었고

친구 김방우(金方佑)로부터 선생의 무남독녀 정자(湞子)양과의 중매가 들어왔을 때

“ 그 선생의 딸이라면 코찡찡이라도 좋으니…”하면서 놀라움과 기쁨에 어찌할 바를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1923년 9월 1일에 있었던 일본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을 일본 당국은

조선인들이 방화, 독물투입 등을 하였다고 유포하고

 치밀한 계획 하에 군, 경 심지어는 자경단까지 조직하여

진화용 찍개, 죽창, 곤봉, 일본도 등으로

조선인 대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 할 때

요(要) 주의인물(注意人物)로 지목받고 있던 서 선생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찍개로 목덜미를 찍어서 그대로 끌고 가서

봇둑 아래로 굴려버렸는데 시체들에 걸려 물 속에 들어가지 않고

다행히도 살아났다면서 그때 생긴 상흔(傷痕)을 감추기 위하여

 목덜미까지 머리카락을 내려 감쌌다고 하였다.

장모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봇둑 아래에서

 안간힘을 다하여 시체(屍體) 밑으로 파고들어 갔는데 깨어보니 병원(病院)이었다는 것이다.

만행으로 당한 육신의 아픈 상처를 식힐 겸

 평소 결의를 재충전하는 기회로 삼아 고향에 돌아 온 장인은

이듬해인 1924년 당신의 외사촌 성세빈(成世斌)이 설립한

사립 보성학교에 복직하여 다시 교편을 잡게 되었다.

1924년 당시 보성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고

훗날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의원〕. 〔1963년 인하공과대학장〕.

〔1966년 한국과학연구소 이사장〕등

 평생 대학 교수사회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이학박사 김병희(金昞熙: 1918~ )는 그의 회고록(2000. 4. 20 발행)에서

 “신 학년이 되면 학교에서 새 교과서를 받는 것이 큰 즐거움의 하나였다.

 ...(중략) 표지에 ‘ 國語讀本(국어독본)’이라고 한자(漢字)로 쓰인 일본말 교과서도 받았다.

그 일어(日語) 책을 받으면 즉시로 했던 일이 표지에 있는 ‘國(국)’자를 지우고

그 자리에 ‘ ’日(일)?자를 써넣는 것이었다.

누가 시켰던 일인지 기억은 없지만 모두가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살살 문지르면 두꺼운 표지의 껍질이 벗겨지고 ...(중략)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

당시의 우리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있었지만, ...(중략)

그 당시 다른 고장에서 그와 같이  ‘ 國語讀本(국어독본) ’을  ‘日語讀本(일어독본) ’ 으로 고쳐서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없다. ...(중략)

일산진(日山津) 에는 그러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

 그러한 학교가 있었기에.....,

그리고, 서진문 선생님은 나의 1학년 때 담임선생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왜경(倭警)한테 교단에서 잡혀갔다.

 우리들은 연행되어가는 선생님을 따라가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그 후 1928년에 동경(東京) 수가모(巢鴨) 형무소에서

놈들의 모진 고문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고 들었고

 그때 고향으로 운구해온 시신을 모시고 우리들 학교에서 장례식을 치른 기억이 난다.

 나도 어린 학생(보성학교 4학년 재학)으로서 참례했었다 ” 고 회고하였다.

조국이나 미국 등 타국에서 어렵게 모금(募金)하여 보내준 자금(資金)으로

중국(中國) 등에서 독립운동 했다고 하신 분들과 비교하여 본다면

 장인께서는 적지(敵地) 일본 땅 최 일선에서

조국의 독립과 재일조선노동자들의 권익과 복지를 위해,

 일본노동당을 이끈 최고 악질 친일파 박춘금(朴春琴)과 맞서 싸울 때부터

일경(日警)은 거처(居處)앞에 감시소를 설치하여 일거일동을 감시하였는가 하면,

백일하에 단독(單獨)으로 일(日) 천황(天皇)을 암살(暗殺)하려다

 검거(檢擧)되어 경찰서(橫浜壽警察署)에서 모진 고문으로 빈사(瀕死)상태에서

 집으로 옮겨졌으나 이튿날 저녁에 운명(殞命)하셨고,

돌아가신 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감시소를 폐쇄하지 않고 유지되었다고

장모님께서 말씀하셨다.

천황 암살 기도(冀圖)가 수포로 사라졌지만

일제(日帝)는 그들의 땅에 일어난 엄청난 그 사건에 대하여

자 국민의 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재판 없이 비밀리에 묻어버리려고

 세상에 알리지도 않았지만 언젠가 장인에 대한

당시의 진실 된 기록이 공개되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나는 굳게 믿는다.

결혼 후 가내시다(金下)아저씨 등 여러 분들이

장모님의 안부인사차 저의 집을 방문하였을 땐

천황 암살 이야기는 빼놓지 않고 하였으며,

말씀 중에 “서 위원장님은 공산주의자가 절대 아니다.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산당의 결집된 힘을 이용한 것뿐이다

김천해(金天海)는 나라를 공산화시키려는 진짜 공산주의자요,

우리 위원장님은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가짜 공산주의자 노릇을 하였고,

서 위원장님의 항일 투쟁에 가장 걸림돌이 된 놈은

조선인으로서 일본 귀족집안에 장가들어 일인(日人) 행세를 하면서

일인 고용주(雇用主)들의 권익을 옹호(擁護)하고

사사건건 철저하게 조선 노동자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선

매국노(賣國奴) 박춘금(朴春琴) 그놈이었다. ”라고 들 하였다.

1928년 장인님의 유골이 애도(哀悼)속에 귀국하여

면민(面民) 장으로 선산인 월정산(月亭山 울산광역시 동구 화정동 근린공원)에 안장되어

면민의 보호 하에 지켜오다가

광복과 함께 좌익계열에서는 장인을 위대한 공산주의의 선구자로 호도(糊塗)하는 한편

 민중들을 강제로 참배 시키는가 하면

 월정산 주위를 점거하여 그들의 본부로 삼고

죽창유격대(竹槍遊擊隊) 훈련장(訓鍊場)으로 사용하는 등

묘소를 광란의 선전물로 이용하면서,

진작 묘소의 주인인 유족들은 참배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고 그들의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장모님 말씀에 의하면 장인께서 즐겨 부르던 노래 가운데 『고향생각』이 있다.

친구 다 가고 밤은 깊어 적막한데

홀로 앉은 이내몸

세상이 모두 잠이 들어 고요한데

고향생각 절로나네.

위의 가사로 된 이 노래는

당시 우리 어린 청소년들도 멋모르고 마을 어른들 따라 불렀는데,

나는 우리 집 옆집에 살면서 일산진 보성학교에 다녔던

이웃사촌 동갑내기 여자동무 장덕순(張德順)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보성학교로부터 번져 나와 애창된 많은 노래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그리운 엄마』,『집 잃은 새(?)』제하(題下)의 이 두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눈 나리고 바람찬 쓸쓸한 밤에

사푼 사푼 눈 내리는 소리뿐이요

재를 넘어 장에가신 그리운 엄마

어이하야 지금까지 아니오시나.

 

새야- 오늘 밤 어디서 자려나

나무수풀 기(氣)떨어진 곳 젖어버리고

오늘 밤 새야새야 어디를 갈까

우리 집 처마밑에 와서 자려나.

 

서진문 선생께서 우리 집 앞을 지나가면

 마당에서 놀고 있던 모든 분들이 대문 밖을 내다보면서

정말 존경하는 뜻으로 한마디씩 말씀을 던지는 가운데

누군가가 먼저 노래를 부르면 여러분이 같이 노래하기도하였고,

 “ 지은이는 모르지만 이 노래를 퍼뜨린 사람은 저분이다”라고들 하였다.

 

동아일보 1928년 12월 7일자(昭和3년)

 “ 拘束中 兩人도 病勢가 危重” 題下의 보도 내용 중에

 “...조합장을 지내엇는데 행렬은 십 오리에 가까?스며 ○○가를 부르며......  ” 하였고,

조선일보 1928년11월 27일자(昭和3년)

“七十組合員參列 ” 이라는 題下에 “ 이십일일에 열린 영결식(永訣式)에는

 붉은귀를압세우고 ○○가를 부르며 이십리길을 행진하야...”

또한 조선일보 1929년 1월 12일자

“ 故徐鎭文君 遺族餞送式 삼일횡빈서 ”라는 題下에

 “...부인 윤씨는 딸 뎡자를 안고 통곡하며

 동지들은 유골을 둘러싸고 군이 평시에 부르든 ○○가를

 고창하야 울음과 노래가 온데 회관을 떠나

동지들의 유족만세삼창으로

동오후팔시 십칠분 급행열차로 횡빈역을 떠나

 군의 고향인 울산(蔚山)으로 향하얏다더라.

” 에서 기사 내용 중에 『○○가(歌)』라는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이 노래의 제목은 분명

『적포가(赤布歌)』라고 생각이 든다.

당시 무슨 집회나 축구시합 및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면

붉은 기를 앞세우지는 않았지만『적포가』를 부르며

 시가지 행렬을 하였는데 우리 꼬마들은

그 행렬 뒤를 따르며 따라 부르기도 하였다.

 더욱 분명한 것은 장인의 유품인 공책 속에 적혀 있는 것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노래가사는 다음과 같다.

풍진난파 밑에서 모인 우리들

배고픔을 한하며 눈물 뿌리며

빈주먹을 마주잡고 앞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뛰는 피는 건나사를 시치고(?)

금수강산 삼천리에 몸을 바쳐서

참다웁게 일하세 숨 쉴 때까지.

 

⑺ 장모님

옛날 우리 집 동편 아래 채 담벽을 따라

북으로 난 오솔길을 100미터쯤 가면 마을 공동 샘이 있고,

 계속 북쪽으로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죽림(竹林)에 둘러싸인 송(宋)생원의 집이 있었다.

 송 생원 집 뒤 지대가 더 높은 곳에 우리 소유의 밭이 있었는데

그 밭 최고 높은 언덕을 중심으로 하여 서편은 북진구(北津區)요

동북편은 화진구(花津區) 이다.

세월은 흘러 송 생원 집이 있던 자리에는 읍사무소 청사가 들어서고,

우리 밭에는 윤(尹)씨 소유의 큰 주택이 들어섰는데

더 넓은 마당에는 정원수(庭園樹)와 함께 화단이 잘 조경되어 있어

사람들은 이 집을 “ ” 꽃밭 집?이라 불렀다.

 우리 밭 위 밭뙈기 오른쪽에는

종탑(鐘塔)이 엄청나게 높은 조그마한 기독교 예배당이 있었다.

 예배당 동편의 아래쪽에 3동(棟)의 교사(校舍)에

넓은 운동장을 잘 갖춘 일인(日人)의 심상고등소학교(尋常高等小學校)는

 그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한 초기에

그들 자녀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우는 등

주변이 일본 문화에 잠식 되면서 크게 변화하여 갔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공동 우물뿐이었다.

뒷동산 최고 높은 언덕에 올라서면

 옹기종기 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집들 중에 동향을 한 지붕이 함석으로 된 집이

 미망인 파평(坡平) 윤(尹)씨 윤상필(尹相必 1901~1992)과

무남독녀 외동딸 정자(湞子)양 모녀가 “싱가 재봉틀 ”  하나를 두고

오순도순 정답게 살고 있는 집이다.

부엌과 방 두 칸, 그리고 앞마당에는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채전(菜田) 밭이 있고, 앞집과의 사이에 감나무 세 그루,

마당 오른편에 장독대가 있고 호두나무 두 그루,

장독대 주위에는 철따라 창포, 봉선화, 채송화, 접시꽃 등

 각종 화초들의 향기로 가득하였다.

 마당에서 멀리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옹기종기 지붕들,

그 너머 저편 바다 가운데 시리섬(瑟島)이 방파제(防波堤)와 연결된 항구,

수평선위로 펼쳐진 뭉게구름, 크고 작은 배들이 오 가는 광경,

 이러한 풍광은 때때로 더 없이 좋은 한 폭의 풍경화로 살아난다.

앞쪽에는 항상 너털웃음을 잘 지으시며 인심 좋은 후꾸다 할매 집,

왼쪽은 수산업을 하는 박씨의 기와집,

 뒤쪽 기와집은 이씨 댁, 남쪽 지반이 조금 낮은 남향집 여주인은

 육십 대인데 소위 안동 권씨 집안의 자손이라면서

항상 곰방대를 길게 물고 긴 치마 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으스대곤 하였다.

앞으로 내가 혼인하면 미망인인 장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형님께서 서진 번화가(西津 繁華街)에

 일인이 지은 2층 집을 매입하여 그 집으로 이사하도록 계획하였으나

장모님께서 완강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장인이 이십 팔세 젊은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적지인 일국(日國) 본토에서 분투하다,

생각을 떠올리기조차 싫은 모진 고문으로

천추에 한을 안고 구천에 떠돌이 넋이 된 당신을

 생각해서라도 내 무슨 낯으로 호의호식(好衣好食)하겠느냐

지금껏 살아있는 것만 해도 죄송스러운데…  ” 하는 것이었다.

나는 부득이 그 큼직한 2층집을 포기하고

 높은 지대에 위치한 조그마한 함석집,

그곳 처가에 신혼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장모님은 항상 웃는 얼굴로 조용히 사람을 대하시고

 참으로 겸손하신 분이었으며 함부로 외출을 하시지 않으셨다.

삯바느질 재봉틀 일을 낙으로 삼으시고 사시면서

시동생 등 방문객이 용돈으로 드린 돈을

놀러온 동네 어린이들에게 아낌없이 골고루 나누어주시는 것이었다.

일상생활이 그야말로 하나 흠잡을 수 없어

우리나라 전통적인 현모양처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당신은 물론

 가족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병인 속병이었다.

부군(夫君)을 잃고부터 앓기 시작한 속병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 고통의 도가 심하여

크게 앓을 때는 온 가족과 함께 밤잠을 설치기가 일수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속병을 앓던 중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1963년으로 기억이 되는데 장모님 말씀에 의하면,

 손에 가방을 든 부군께서 꿈속에 나타나셔서

병을 고쳐 드리겠다면서 어느 산속 정자에 올라

당신의 복부(腹部)에 주사를 한대 주시더라는 것인데

 그 후로 병이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으시어서

아흔 두수를 사시는 동안에 병 없이 사시다가 운명하실 때도

주무시듯이 조용히 이승을 하직하셨다.

내가 신혼 초기에 읍사무소에 봉직하는 중

집사람은 점심시간 때면 따뜻한 밥과 함께

여분의 반찬을 넉넉히 싸들고 사무실에 왔는데

 동료들과 둘러앉아 반찬을 나누어 먹을 때마다

직원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는 말이

 “그 어머님에 그 따님 ” 이라고…

장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른

삼일 후인 삼우날 밤, 한번도 아버지 꿈을 꾼 적이 없었던

집사람 꿈에 옅은 갈색 춘추양복 차림에 검정색 나비넥타이를 매신

 장인어른께서 현관문을 통해 거실에 들어오시더니

“湞子야 욕봤다” 한마디 말씀만 하시고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리더란 것이다.

돌아가신 장모님께서는 저승 나라에 계신

 장인님 곁으로 가신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한 것이리라......

나의 선친께서는 3대 독자요

 4대에 와서 나는 아형(我兄)과 함께 형제가 태어난 것이다.

유복하게 자라왔지만 직계 3~4촌 형제가 없어

 외롭게 살아오신 아버지께서는

 먼 친척들을 가까운 촌수(寸數)로 당겨 와서

사촌도 만들고 오촌도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과 서로 간에 무슨 큰 정이 있으랴.

 우리 형제 나이가 청년시절에 들어섰을 때 형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 혼인(婚姻)하면 자식들을 많이 낳아 직계 간에 화목하게 잘 지내도록 해주자고… ”

결국 형님은 아들 둘을 보시고

나는 2남 4녀로 현재 며느리, 손자, 사위, 외손자, 손녀 모두 26명을

 한사람도 손실 없이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모두가 장인 장모님의 가호(加護)가 있기 때문이라고

우리 내외는 굳게 믿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집사람은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과 아침에 깨어나면

 두 손 모아 부모님의 명복을 염원하는 예를 한 차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