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먼구름 한형석 선생 추모행사장, 중간에 앉아계시는 김상수 선생)
(어떤 문화인 행사장, 앞줄 오른쪽 김상수 선생)
(길가에서, 지팡이 가진 필자 천재동 왼편에 김상수 선생)
* 부산문화 복덕방(福德房) 김상수(金尙洙)
부산의 문화인(文化人) 이라면
김상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만큼
그의 명성(名聲)은
타지방(他地方)의 문화인들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나지막한 키에 양복 차림으로 머리에는 밤모자를 쓰고,
어깨에 멘 검정색 서류 가방 속에는
당일의 조(朝)·석간신문(夕刊新聞)과 개인전 등
각종 문화 행사 팸플릿, 포스터를
그리고 호주머니 속에 소중하게 간직한 두세 개의 수첩 속에는
문화인들의 성명, 주소, 직장, 연락처 등이 빼곡하게 기재되어있어
언제 어디서나 필요할 때면 긴요히 이용되곤 하였다.
남포동으로, 광복동으로, 신문사로,
방송국에 종종걸음으로 분주하게 드나들면서
문화를 알리고 참여시키는 일은 물론,
문화인 간에 인사 소개 등
그야말로 『문화 복덕방』인 그의 진행적(眞行蹟)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김상수는 대구 출신으로 6. 25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정착하였다.
1998년 사망할 때까지 미술 전시회나
어떤 문화행사의 주무자(主務者)치고 음으로 양으로
그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맛좋은 음식이 나오면 꼭꼭 챙겨서
우리 집 사람에게 가져다준다는 애처가이기로도 소문 나 있다.
김상수는 평소 자신과 직접 관계되는 일에는 무관심 했지만
남의 일에는 노고를 아끼지 않고 힘이 되어 주면서
실상 자신의 사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김상수는 나를 아끼고 많이 도우면서도
집에서까지 자기 부인에게 천재동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가 고인이 된 후 그의 미망인은 수차례에 걸쳐
전화로 “우리 영감은 갔지만 선생님은 오래 사셔야 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하루는 미망인 김순희(金順姬) 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주인 영감이 남겨 둔 신문 스크랩, 팜플렛, 포스터,
수많은 사진들 등 유품이 많이 있으니,
이것들을 천선생께 드리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가 되리라 생각되어,
내 개인이 가질 것이 아니라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어
나와 같이 기회를 만들어 박물관에 가지고 가자고 하였는데
그 후로 소식이 없어 궁금하였다.
전시장 한 편 탁자위에 수첩을 뒤적이며
부탁받은 전시회 안내장 수취인 주소를 속필로 써 내려가던
문화(文化)가교(架橋) 김상수 형이 그립다.
(김상수 선생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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