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곡에 대한 신문기사 76

천재동의 창극단

부산민속예술관은 잊혀져가는 우리고유의 창극唱劇을 보존ㆍ계승하기위해 창극단을 발족,14일 하오1시, 3시 두차례 찻정기공연으로 〈춘향전〉을 동예술관에서 내놓는다.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조직된 이창극단을 위해 인간문화재 천재동씨는 2년 전부터 국악인으로 발굴 ㆍ 육성하여 왔는데 창단을 계기로 오는 7월까지 10여회의 공연을 가질 계획이다. 연출은 천재동씨가 한다. 부산일보 1976년 3월 13일(토요일) 〈〉 「」 〈〉

부산광복동 거리에 나온 민속시위

민속이 온실에서 거리로 나왔다. 지난 30일 東萊野遊(동래야류) 가면제작부문의 인간문화재 천재동씨(59)가 이끄는 부산계성여자상업고등학교향토반 학생 130명은 광복동 거리를 행진하며 웅박캥캥의 굿거리 장단을 타고 농악놀이를 펼쳤다. 한나라극단의 창립자인 천재동씨는 여덟가족을 부양하며 근근히 생활하는 속에서도 빗돈과 정부에서 지급하는 생활보조비 그리고 그림을 팔아 모은 11만원을 경비로 보탰다. 천재동씨는 「젊은이들의 힘으로 민속이 대중속에 파고들어 이런 공감대를 일으키는 것을 보니 날려버린 돈이 아깝지 않다 」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민속이 젊은세대에서 그 끈기를 되찾아 시작했슴을 이번 민속의 시위가 웅변해 준 것이라고 할까. 국제신보 1974년 월 일

「동래길놀이」 발굴

잊혀졌던 동래야류의 주역인 길놀이가 동래야류 가면제작부문 인간문화재 천재동씨가 각고의 노력끝에 발굴하고 길놀이의 행렬도를 완성, 길놀이가 재현될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길놀이는 서양의 카니벌가장행렬에 비견될수 있는 민속으로 동래지방 독특한 멋을 갖고있다. 사회 계층의 구별없이 참가했던 것은 중산층이 주류였던 당시 동래사회를 반영하는 현상이었을 것이다. 천재동씨의 길놀이 발굴을 계기로 동래민속의 종합연구가 있어야 하겠다는 전문가들의 얘기다. 국제신보 1973년 12월 5일(수요일)

경기도 "98 기획전시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기념 우리문화.우리얼을 찾아~~~ 탈 60점, 토우 1백점, 동요화 1백점 등 총 2백60점의 주옥같은 작품이 선보일 예정이다.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와 민족적 자긍심을 찾는데 도 문화예술관이 나섰다. 1998년 8월 17일~8월 29일까지 관람인원 17.478명 이었고 경기도의 요청으로 일주일 연장하였다. (연이어 경기도 일산시에서 초청전을 요구하여 왔으나 작가 천재동이 힘들고 지쳐서 아쉽지만 죄송한 마음으로 거절 할 수 밖에 없었는데 훗날 두고두고 아쉬워하였다.)

천재동의 대학촌

국제신문 1997년 8월 28일 목요일 가난한 예술가들의 사랑방 역할 추/억/의 그 곳 ⑰ 주막 「대학촌」 〔천 〔재 〔동 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주저없이 「추억 」을 말하겠다. 세상에 나온 지 여든 해가 넘었지만 동지들 즉 예술활동가들과의 우정이 가장 기억에 남으며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게 한다. 가족들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어찌보면 남자들 세계에 있는 우정이랄 수도 있다. 나는 한 평생을 연극과 그림, 탈조각예술 등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를 하고 있지만 60, 70년대 광복동 입구에 있던 「대학촌」시절을 잊을 수 없다. 당시 부산에서 대학촌을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유명했는데 오히려 서울 마산 등 타 지방 사람들에게 더 알려진 사교의 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