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159

공무원의 무능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기다 부산시 주체로 『풍어제』가 주로 송도 해수욕장에서 연중행사로 베풀어졌다. 행사 때마다 시(市)에서는 나에게 무보수 봉사 협조 의뢰가 온다. 한 해는 해수욕장 유람 보트를 이용하여 용(龍), 백조(白鳥) 등으로 만들어서 바다에 띄우는데, 이를 제작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무당(巫堂) 김석출(金石出, 제82호동해별신굿보유)의 풍어제 굿에 세울 깃발들을 백사장에 눕혀두고 모래구덩이를 파는 동안에 오 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채인 모래가 그 깃발들은 물론 같이 놓아둔 태극기도 묻어버렸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깃발들을 바르게 세우고 앞으로 있을 행사 준비를 끝마쳤다. 이튿날 국제신문 지면에 천재동 국기 모독이란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어느 해 장소가 바뀌어 미포리(尾浦里) 앞 바다에서..

천재동이 한 일

나는 이런 일들을 해냈다 1965년『부산 민속예술보존협회』에 가입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속예술에 몸을 바쳐 장장 40년 세월,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동안 나는 희로애락 중 노怒자만 빼놓고 묵묵히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와 자식들의 교육에 한층 애써야할 쉰다섯의 나이에 인정받고 있던 교직을 박차고 도망치듯 나와 버린 내가 무보수도 마다않고 민속예술단체에 몸을 던진 것은 각오가 크게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희망하였던 꿈을 달성하기위해 조형미술과 연극예술을 공부하였기에 동서남북 가릴 것 없이 투신한 것이었다. 교직에서 불태운 열정을 다시 지펴 시기, 질투, 음해, 왜곡에 아랑곳 않고 내가 아니면 누가하랴! 자부심을 가지고 묵묵히 발굴, 연출, 제작, 지휘하여 오는 가..

45. 노래 「인사」「손뼉을 칩시다」

노래 「인사」「손뼉을 칩시다」 울산에서의 중심 학교인 태화국민학교(太和國民學校, 현: 울산초등학교)를 비롯해서 각 면에서 선발된 교사들이, 지원하는 차원에서 파견되어 온 후 얼마 가지 않아서 정식으로 교장, 교감, 교사들이 부임하여 그동안 어수선하던 학교에 학무가 수립되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게 되었지만 식민지 생활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미풍양속은 퇴색되고 이러한 사회 여건 속의 민심은 각박해질대로 각박해져 어른 아이 모두가 먹고 살기에 급급하여 허덕이는 혼란기에 노래라고는 고작 「봉선화」「별 삼형제」「일편단심」「학도가」「근학가」같은 옛 노래 뿐이어서 좀더 아동들에게 정서적으로 안정을 줄 수 있고 믿음과 사랑이 담긴 현실에 맞는 인성 교육 차원의 새로운 노래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부모, 선생님, 동..

방어진의 일본인(日本人)과 일생인(日生人)

우리 집 부근에는 일본인(日本人)과 일생인(日生人: 히나세진) 두 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께서는 히나세호갱(日生方言)을 잘 하셨다. 일생인 이란 일본(日本) 강산현(岡山縣) 히나세(日生) 지방의 사람들로 다 같은 일본(日本)사람이면서도 그들은 타 일인들로부터 천대(賤待)를 받았다. 우리도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 사람이다 해서 일생인(日生人)이라 불렀고, 일생(日生)을 방언으로 ‘히나세’라 불렀다. 두 집단 일인들의 축제행사 시에는 각각의 단체를 상징하는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행사에 임하였다. 일본 강산현(岡山縣) 일생(日生)이란 부락에서 도래한 집단인 ‘일본일생청년단’ 깃발과 기타 일본 각지에서 도래한 사람들로 결성 된 ‘대일본청년단’의 깃발인데 日生人(히나세진)들의 말을 히나세변(辯)이라고도 하..

촌놈 핫바지

중요무형문화재기예능보유자들이 명예를 스스로 지키자는 것은 물론 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맞설 수 있는 단합회를 만들고자 1970년대에 가칭 「중요무형인간문화재총연합회」란 간판을 내 걸고 당시 중요무형문화재제19호 「선소리 山打令」 예능보유자 아창배를 회장으로 선출하기에 이르렀다. 당국은 우리들의 이러한 행위에 당황한 나머지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회장은 탄압에 맞서 싸우다 견디지 못하고 부득이 사퇴하고 말았지만, 이에 분노하여 자진해서 회장직을 맡아 나선 사람이 바로 중요무형문화재제26호 「영산(靈山)줄다리기」 예능보유자 조성국(曺星國)이었다. 당국에서는 보유 자격을 취소한다느니 기타 여러 가지 방법을 다하여 탄압하였지만 회장은 「벌을 줘도 감수하겠다」면서, 고향에 논밭을 팔아서(?) 상경하여 서울거주 보..

한국적 원초성

한국적 원초성에 돋을 새긴 현대예인정신 채 희 완(부산대 교수, 미학) 선생님을 처음 뵈온 것은 1972년 1월 부산 서면께의 어느 작은 2층 사무실에서였다. 그곳은 작업실로도 사용되는 듯 여기저기 바가지 탈들이 널려 있어 마지막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공방에 쓰이는 도구들을 한쪽으로 물리치시며 우리를 맞아주셨다. 우리는 그때 회원들이었는데, 방학을 맞아 들놀음의 고장 부산 동래를 찾았던 것이다. 선생님은 「동래 들놀음」의 탈에 대하여 새로운 의견을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탈전문가로 보시는 듯 반가워하셨다. 우리는 실상 탈과 탈춤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애송이였다. 우리는 다만 지난해 봄(1971년 4월) 서울 명동의 코스모스백화점 전시실에서 열린 「천재동 창작가면 특별전」(문공부 문화재 관리..

문화예술 지킴이

문화예술 지킴이 / 장인 증곡 천재동 바가지에 해학과 풍자를 입히는 장인 증곡 천재동 심상교 (부산교대 교수) 울산 방어진에 일본 구파연극단이 왔다. 가부끼(歌舞伎)도 왔고 서커스, 마술단도 왔다. 영화도 개봉되어 여러 명의 남녀 배우들이 개봉 인사차 들렀다. 울산 사람들뿐 아니라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 들어 이들을 환영하며 열광했다. 그 숲에는 등에 업혀 구경 나온 네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혼자 영화와 연극을 보러 다니게 되었을 때 그 아이는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리라. 그리고 80여년이 흘렀다. 그는 지금, 배우 대신 멋진 말뚝이 할아버지가 되었다. 동래야류 탈제작 기능보유자인 천재동선생님이 바로 그 분이다. 말뚝이가 동시대의 윤리관을 지키듯 천재동옹은 부산의 문화를 지키는 부산문화의 말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