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독립투사 아버지‘서진문’을 회고(回顧)합니다 ‘’ 《아내 서정자의 처녀시절》 ◎ 아내의 회고(回顧)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時代에 살다간 아내의 부친 인간 서진문(徐鎭文)의 일면을 회고하도록 지면을 할애(割愛)함은 아내 서정자(徐湞子)가 그의 과거사를 더 잊어버리기 전에 어려서부터 직접 겪었던 일과 장모와 장인 그..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10.03.07
99. 인민교육을 시켜라 ! 신설 방어진국민학교(方魚津國民學校)에 근무하는 동안에 여러 차례의 사건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한 가지 수난사(受難事)를 소개하면, 어느 날 밤 죽마고우(竹馬故友) 김영식(金永植)이 곤히 잠자고 있는 나를 깨웠는데 그때 시간은 새벽 1시경 이었다. 시국이 ..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11.05
98. 귀국 ·8년 동경생활을 접고 1943년 11월이 되자 나는 귀국 할 준비하느라 서둘렀다. 출발 앞날 고교(高橋)부인께 그 동안의 고마움에 감사드리고 작별의 인사를 했더니, 부인은 내 손을 꼭 잡고 눈물 지우며 세 가지 소원을 받아 달라는 것이다. 첫째는 차(車)속에서 먹을 주먹밥이고, 둘..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11.05
97. 동경(東京) 유락좌(遊樂座) 국민극연구소 수료식을 마치고 무슨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동극단(移動劇團)으로 발족하지 않았고, 모두가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다. 때 마침 오세덕(吳世德) 번역 백경정(白鯨亭)』이 부민관(府民舘)에서 공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날더러 도와 달라는 요청에 응하여 일했다...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10.16
96. 연구생 시절 ‘좋아 그대로해!’ 연구생은 A, B 두 반으로 나누었는데 나는 A반에 속했다. 동경일대(東京日大) 예술과 출신인 허집(許執)이 반장을 맡았다. 당시 연극에서는 사투리 사용은 절대 금했기 때문에 나는 배우 되기를 단념하고 무대미술과 연출에 힘을 기울였다. 연구생 중 평양 출신 하나, 충청도 하나, ..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10.16
95. 국민극 연구생으로 국민극 연구생으로 어느 날 우연히 총독부(總督府) 주최 국민극 연구생(國民劇 硏究生) 모집이란 기사를 보았다. 나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로 알고, 더블 양복 한 벌 맞춰 입고 일단 귀국하여 서울로 향했다. 관철동(貫徹洞) 조그마한 여관에 투숙하기로 하고 시험장인 휘문..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
94. 산제(山祭) “처녀를 잡아라” 산제(山祭) “처녀를 잡아라” 우리 특설 인체과 동료 몇몇이 북륙청삼현(北陸靑森縣)으로 사생 여행을 갔다. 주로 산음도(山陰道)란 동해(東海)로 접한 국도를 걸었다. 이 길은 옛날 성주(城主)인 대명(大名)들이 가마를 타고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세를 과시하며 행차한 길로써..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
93. 두 번째 청루(靑樓) 구경 두 번째 청루(靑樓) 구경 얼마 뒤에 나는 홍고구 긴수깨쬬(本鄕區金助町)로 방을 옮겼다. 고교(高橋)란 성(姓)을 가진 사람의 집이었는데 남편은 천엽포병현역(千葉砲兵現役)으로 본토 방위로 근무하는 관계로 집에는 없었다. 나와 동갑인 부인은 가내 양재업(洋裁業)을 하였고 국..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
92. 일본 사람이 될 것만 같아 일본 사람이 될 것만 같아 1942년 강세를 부리던 일제(日帝)는 전세가 기울어져 가는 판이어서 모든 필수품은 배급제로 통제 되면서 일본 전역이 암거래 세상이 되었다. 나는 판교구(板橋區) 임정(林町) 전셋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옮겨간 아담한 기와모옥(母屋)에 서남 방향으로 이..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
91. 처음가본 창녀가(娼女家) 처음가본 창녀가(娼女街) 어느 일요일 점심을 먹고 바깥에 나가 포플러 가로수 밑에 숨어서 식후 담배를 몰래 피우다가 그만 이학수의 양모(養母)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여보 여보! 천(千)상이 건방지게 담배를 피워요!”해서 집안은 큰 소동이 일어났다. 야구로 인해, 이 전촌(..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