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귀국 ·8년 동경생활을 접고 1943년 11월이 되자 나는 귀국 할 준비하느라 서둘렀다. 출발 앞날 고교(高橋)부인께 그 동안의 고마움에 감사드리고 작별의 인사를 했더니, 부인은 내 손을 꼭 잡고 눈물 지우며 세 가지 소원을 받아 달라는 것이다. 첫째는 차(車)속에서 먹을 주먹밥이고, 둘..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11.05
97. 동경(東京) 유락좌(遊樂座) 국민극연구소 수료식을 마치고 무슨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동극단(移動劇團)으로 발족하지 않았고, 모두가 뿔뿔이 헤어지고 말았다. 때 마침 오세덕(吳世德) 번역 백경정(白鯨亭)』이 부민관(府民舘)에서 공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날더러 도와 달라는 요청에 응하여 일했다...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10.16
96. 연구생 시절 ‘좋아 그대로해!’ 연구생은 A, B 두 반으로 나누었는데 나는 A반에 속했다. 동경일대(東京日大) 예술과 출신인 허집(許執)이 반장을 맡았다. 당시 연극에서는 사투리 사용은 절대 금했기 때문에 나는 배우 되기를 단념하고 무대미술과 연출에 힘을 기울였다. 연구생 중 평양 출신 하나, 충청도 하나, ..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10.16
95. 국민극 연구생으로 국민극 연구생으로 어느 날 우연히 총독부(總督府) 주최 국민극 연구생(國民劇 硏究生) 모집이란 기사를 보았다. 나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로 알고, 더블 양복 한 벌 맞춰 입고 일단 귀국하여 서울로 향했다. 관철동(貫徹洞) 조그마한 여관에 투숙하기로 하고 시험장인 휘문..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
94. 산제(山祭) “처녀를 잡아라” 산제(山祭) “처녀를 잡아라” 우리 특설 인체과 동료 몇몇이 북륙청삼현(北陸靑森縣)으로 사생 여행을 갔다. 주로 산음도(山陰道)란 동해(東海)로 접한 국도를 걸었다. 이 길은 옛날 성주(城主)인 대명(大名)들이 가마를 타고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세를 과시하며 행차한 길로써..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
93. 두 번째 청루(靑樓) 구경 두 번째 청루(靑樓) 구경 얼마 뒤에 나는 홍고구 긴수깨쬬(本鄕區金助町)로 방을 옮겼다. 고교(高橋)란 성(姓)을 가진 사람의 집이었는데 남편은 천엽포병현역(千葉砲兵現役)으로 본토 방위로 근무하는 관계로 집에는 없었다. 나와 동갑인 부인은 가내 양재업(洋裁業)을 하였고 국..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
92. 일본 사람이 될 것만 같아 일본 사람이 될 것만 같아 1942년 강세를 부리던 일제(日帝)는 전세가 기울어져 가는 판이어서 모든 필수품은 배급제로 통제 되면서 일본 전역이 암거래 세상이 되었다. 나는 판교구(板橋區) 임정(林町) 전셋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옮겨간 아담한 기와모옥(母屋)에 서남 방향으로 이..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
91. 처음가본 창녀가(娼女家) 처음가본 창녀가(娼女街) 어느 일요일 점심을 먹고 바깥에 나가 포플러 가로수 밑에 숨어서 식후 담배를 몰래 피우다가 그만 이학수의 양모(養母)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여보 여보! 천(千)상이 건방지게 담배를 피워요!”해서 집안은 큰 소동이 일어났다. 야구로 인해, 이 전촌(..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
90.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특설(特設) 인체과로 ·가와바다화학교(川端畵學校) 특설(特設) 인체과로 다이해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의 입학시험은 석고 소묘였는데 간단하였다. 학교는 네모반듯한 백색 건물이고 조그마한 운동장 북편(北便)에 평옥(平屋)의 일본화(日本畵)를 공부하는 교사(校舍)가 있었고, 교무실에 들어..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9
89. 일본인들의 야구열풍 일본인들의 야구열풍 동경(東京)생활하던 중 먼 친척이 되는 이학수(李鶴洙) , 동경도립공업고교(東京都立工業高校)를 졸업, 토목기사로 동경도청(東京都廳)에 근무하고 있는 한상조(韓相祚), 동경물리학교(東京物理學校) 재학 중인 김병희(金炳熙), 동양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 ..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