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처음 본 태극기 처음 본 태극기 기미년(己未年: 1919년) 대한 독립 만세가 세상을 들끓게 하였을 때쯤 하루는 소녀 한 사람이 대문에 급히 들어서더니 큰 목소리로 “수비대(守備隊)가 옵니더!!” 소리치고는 서쪽 길로 달려가면서 또 외쳤다. 오늘도 우리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러자 ..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5
87. 방어진의 일본인(日本人)과 일생인(日生人) 일본인(日本人)과 일생인(日生人) 우리 집 부근에는 일본인(日本人)과 일생인(日生人: 히나세진) 두 집단이 살고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께서는 히나세호갱(日生方言)을 잘 하셨다. 일생인 이란 일본(日本) 강산현(岡山縣) 히나세(日生) 지방의 사람들로 다 같은 일본(日本)사람이면..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5
86. 방어진의 곽암(藿岩: 미역 돌) 방어진의 곽암(藿岩: 미역 돌) 우리나라에 처음 온 일본 사람들이 크고 싱싱한 미나리와 부드럽게 너울거리고 6~7척이나 되는 미역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양식 미역을 보고,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과거 곽암에서 생산한 미역을 본다면 일본사람 못지않게 놀랠 것이..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5
85. 총독 「방어진」초도순시 총독 초도순시 일제 강점기에 방어진은 조선 제일의 수산기지에다 일본인 거주 집단지였기 때문에 일제의 시각에서는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역대 총독들은 1박 2일 예정으로 방어진을 초도순시 방문하였다. 1936년경 어느 날 미나미지로(南次郞) 총독이 방문하여 묵은 ‘사노기야(..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5
84.“동래학춤” 발굴은 이렇게 동래학춤은 이렇게 발굴되었다 생전에 백색바지, 흰 구두, 분홍색 윗저고리를 즐겨 입은 멋쟁이 김희영(金熙英, 동래야류 넷째 양반예능 보유지정 직전에 사망)이 활보하고 다닐 때 동래학춤은 발굴이 시작되었다. 동래 토박이인 김희영은 학춤에 고명한 김기조(金基祚)선생의 아들로서 ..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9.25
83. 한국 최초의 『千在東 創作 假面展』 (한국최초 창작탈 전시회) “천재동창작가면특별전”(1971. 4) 주최 : 문공부문화재관리국 후원 : 한국가면극연구회 장소 : 서울코스모스백화점 전시관 (참고:동래야류탈을 배경으로 촬영 함. 중간이 증곡 천재동) 梁世珠와 千在東 두 사람이 매일 함께 제작활동에 전념하던 중 어느..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8.01
82.『동래야류 소고』 소책 엮어냄 나는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훨훨 나는 기분으로 교문으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도 없고 자리도 없는 무명무실한 일에 무작정 헤매는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도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되었다. 모르면 물어가라는 명언을 교훈 삼아 이리저리 뛰었다. 그 보고 느낀 것을 내 ..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8.01
81. 내가 갈 길을 선택했다 45세에 교감자격증을 가지고도 따로 하고 싶은 일이 많아 만년 평교사를 희망했다. 교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교감하고 교장 하다가 정년 되면 수억 원의 퇴직금을 받아 편안하게 살면서 취미삼아 野遊에 몸을 담을 것이냐 아니면 내가 유년 시부터 화가나 배우가 되려고 입지를 ..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8.01
80. 민속예술에 몸을 담고 ◎ 辛佑彦 翁의 귀중한 證言 1965年 10月 “ 동래야류”란 이름의 假面舞劇이 全國民俗藝術競演大會에 出戰하여 大統領賞을 수상하여 歸省報告를 겸한 祝賀公演을 釜山日報 프레스홀(4층)에서 개최했고 나는 창작가면작품전을 부산시 공보관 전시장에서 개전하고 있었다. 나는 이 ..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8.01
79. 울산방어진 축구이야기 조국 광복 전 당시 축구공은 3호, 4호, 5호, 6호등으로 크고 작은 공들이 있었다. 시합 때는 4호로 정하고 가격은 2원이었다. 축구란 운동은 눈이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사시사철 어디서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 한개만 있으면 운동할 수 있는 것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면 대.. 천재동 회고록 연재(連載) 2009.05.26